패티김의 ‘이별’

현대 대중 가요사에서 '최초'와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쥔 이들은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패티김은 특별하다. 패티김은 '디너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함께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였다.

패티김의 본명은 김혜자다. 서울 흑석동에서 살다가 6·25가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가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휴전 후 상경해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국악에 관심을 두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화양연예주식회사에서 만든 '베니 김 쇼'의 견습 단원으로 들어간 그녀는 1959년 1월 '린다김'이라는 예명으로 미8군 쇼 오디션에서 합격해 활동했다. 하지만 큰오빠의 극심한 반대로 1년여간 활동을 접었다가 1960년 초 조선호텔 전속 가수로 스카우트되면서 '패티김'이란 예명으로 데뷔했다. 미국의 유명 팝가수인 패티 페이지 같은 명가수가 되겠다는 뜻으로 단 예명이라고 한다.

이후 재일교포 와타나베 히로시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빅밴드 스타더스트의 전속 보컬리스트로 활약했다. 이때 일본 NHK TV초청 패티김 콘서트를 개최하는데, 해방 이후 한일 문화교류를 위한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초청된 최초의 한국가수로 기록되고 있다.

이 무렵 패티김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인 작곡가 박춘석(1930~2010)을 만난다. 박춘석 선생이 "노래 잘하고 키 큰 신인가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1962년 '초우'와 번안곡 '파드레'를 패티김에게 주면서 자신의 곡이 불러지길 원했지만, 그녀는 얼마 안 돼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박춘석 선생과의 인연을 두고,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이룰 수 없는 사이였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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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석 씨와 패티김.

최초의 한국가수 개인으로 미국에 진출한 그녀는 공연과 뮤지컬에서 활약하며,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Tonight Show)'에 출연했다.

1963년 미국에서 한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박춘석의 권유로 톰 존슨이 불러 유명한 'Till'을 번안한 '사랑의 맹세'를 발표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6년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귀국한 패티김은,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주연인 애랑 역을 맡으며 동명의 주제가를 불러 히트시켰다. 또한 박춘석이 작곡한 '초우'를 영화주제곡으로 부르고, 길옥윤이 작곡한 '사월이 가면', '사랑하는 마리아' 등을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패티김이 귀국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길옥윤(본명 최치정, 1927~1995)도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해외에서 활동한 가수와 작곡가였기에 둘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매스컴에서 인터뷰를 할 때면 두 사람을 같이 불렀다. 이후 길옥윤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사월이 가면'을 전화로 그녀에게 들려줬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한 러브레터였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길옥윤과 패티김 콤비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작곡가 박춘석의 마음은 어린애가 장난감을 뺏기거나 자기 애인을 뺏긴 기분이었을 거라고 패티김은 나중에 고인이 된 그를 회상하며 말했다.

패티김과 길옥윤은 음악적으로 환상의 콤비였지만, 부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패티김은 길옥윤을 두고 "그는 하루하루 사는 사람이고, 저는 한 달, 일 년을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에요. 옆길을 안 갈려고 하니까요. 서로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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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앨범.

별거 중에도 길옥윤은 그녀를 염두에 두고 계속 곡을 지어 넘겨주곤 했었다. 어느 날 뉴욕에 머물고 있던 길옥윤으로부터 "패티, 내가 새로운 곡을 썼는데 들어볼래요?"라며 전화가 왔다. 그는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말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통한과 패티김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길옥윤이 보내온 악보의 제목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였다. 이에 패티김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별'로 고치면 어떻겠느냐"며 그의 동의를 받아 음반을 발표하였다. 1973년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반향이 돌아왔다. 전국 어디에서나 그녀의 노래 '이별'이 울려 퍼졌으며 온종일 흘러나왔다.

패티김의 '이별'이 인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 두 사람은 공식 이혼을 선언했다. 길옥윤이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들어준 '이별'은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이혼 기념곡이 되고 말았다. 이후 패티김은 다시 박춘석 사단으로 옮겨 활동한다.

박춘석과 다시 합친 패티김은 '못 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가시나무 새' 등 쟁쟁한 명곡을 부르며 70년대를 풍미했다.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했으며,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 최초로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신기원을 만들었다.

수많은 히트곡을 부른 그녀는 2012년 은퇴를 선언하고 1년간의 이별 콘서트 투어를 통해, 전국의 팬들과 이별을 고한 뒤 2013년 10월 26일 55년 가수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패티김은 자신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물으면 1초도 망설임 없이 '구월의 노래'를 꼽는다. 길옥윤 작사, 작곡으로 다른 노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별한 사연은 없지만 격조 높은 멜로디와 은유의 깊이를 지닌 감동적인 가사로 이루어져 노래가 한층 더 돋보인다. 얼마 전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살펴드리고 칵테일 한잔의 여유를 부리며 '구월의 노래'를 듣고 싶다던 고객의 얼굴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잊을 수는 없을 거야

- 길옥윤 작사·작곡인 패티김 '이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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