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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에 휩쓸려 세상 밖으로 나온 8000년 전 삶

[습지 문화 탐방] (1) 창녕 비봉리패총
2013년 '매미'로 양·배수장 침수
이듬해 확장 공사 중 패총 발견
소나무쪽배·토기 등 유물 쏟아져

2017년 03월 09일(목)
공동취재팀 webmaster@idomin.com

2018년이면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출범 10년이 된다. 2008년 경남에서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를 치른 성과다. 람사르협약은 정식 명칭이 '물새 서식처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다. 1971년 이란의 도시 람사르에서 시작할 때는 물새=철새에 초점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제13차 당사국총회(UAE)를 앞둔 지금은 인간의 삶과 역사·문화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람사르협약은 습지가 생태적으로는 물론 역사·문화적으로도 소중함을 확인하면서 그 보전과 현명한 활용을 향하여 진화 중이다. 이에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은 2017년을 맞아 한 해 동안 경남의 여러 습지와 그 역사·문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3~12월 매달 둘째·넷째 목요일 경남도민일보에 20차례 연재된다.

태풍 매미의 악몽

2003년 추석 연휴는 끔찍했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은 12시간도 되지 않았다. 추석 다음 날인 9월 12일 오후 3시 제주도 근접과 저녁 8시 30분 남해안 상륙을 거쳐 이튿날 새벽 2시 30분 동해상 진출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매미는 강풍과 폭우로 경상도를 남에서 동으로 비스듬히 지르면서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바다는 만조가 겹치는 바람에 최고 4m를 넘는 해일이 해안을 덮쳤다. 산골에서는 빗물이 계곡으로 몰리면서 비탈이 사태 졌다. 바닷가 마산에서는 젊은이들이 건물 지하에서 해일을 만났고 화왕산 산기슭 창녕에서는 한 집안이 고스란히 흙더미에 묻혔다.

상류에서 빗물을 받아 안아 부풀어오른 낙동강은 경남에 이르러 지류와 지천으로 역류했다. 우포늪을 둘러싼 대대제방을 비롯해 창녕·의령 등지에서 둑이 터졌다. 건물은 잠겼으며 인명은 스러졌다. 14개 시·도 156개 시·군·구의 1657개 읍·면·동에 특별재해지역이 선포되었다.

비봉리 양·배수장 유수지

창녕 부곡면 비봉리 양·배수장도 침수를 피하지 못했다. 비봉리 마을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뒤편 북쪽에는 월봉산이 자락을 펼치고 마주 보는 남쪽에는 비룡산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청도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마을서 나오는 개울물을 받아들인다. 비봉리 양·배수장은 이 개울 수위를 조절한다. 물이 모자라면 청도천에서 양수하고 물이 넘치면 청도천으로 배수한다. 그래야, 마을 앞 들판을 온전하게 보살피고 지킬 수 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2004년 4월 비봉리 양·배수장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매미보다 더한 폭우도 감당할 수 있도록 펌프 용량을 늘리고 그에 걸맞게 물이 머무를 유수지(遊水池)를 새로 파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바닥을 들어내면서 묻혀 있던 조개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발굴이 시작되었다. 국립김해박물관이 2004년 11월 30일~이듬해 8월 23일, 2010년 3월 15일~10월 9일 두 차례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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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 된 양·배수장

비봉리 양·배수장은 2007년 8월 28일 '창녕 비봉리 패총'으로 사적 제486호에 지정되었다. 패총은 조개더미다. 조개더미는 지금으로 치면 쓰레기장이다. 먹고 남은 뼈나 껍데기 또는 쓸모가 없어진 생활용품을 여기 내다버렸다. 조개무지는 정착 생활의 증거다. 떠돌아다녔다면 쓰레기가 쌓일 리 없기 때문이다. 비봉리 패총은 다섯 층으로 구분된다. 아래 세 층은 8000년~6500년 전, 위 두 층은 각각 6500년~5500년 전과 5500~4000년 전으로 짐작된다.

가장 아래 다섯 번째 층에서는 소나무 쪽배가 나왔다.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배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축에 들 만큼 귀한 유물이다. 넷째 층에서는 토기와 자돌구(刺突具:작살·창 끝에 붙여 찌를 수 있도록 짐승뼈로 뾰족하게 만든 도구)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셋째 층에서는 그물추가 나오기 시작했다. 둘째 층에서는 돌도끼와 갈돌, 노(삿대)와 함께 당대인들의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멧돼지무늬토기가 나왔다.

배 출토 상태. /문화재청

눈길을 끄는 유물은 가장 위층에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 똥 화석·망태기가 나왔으며 장신구도 발견되었다. 몸을 치장하는 일은 먹고살기가 넉넉해진 다음에나 가능하다. 아울러 아래층에서 자돌구와 그물추가 나온 데 이어 낚싯바늘도 새로 나타났다. 조그만 유적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무엇을 먹었을까? 재첩·굴·꼬막 껍데기, 상어 척추, 가오리 꼬리뼈와 잉어 이빨이 나왔다. 일대가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역이었던 것이다. 사슴·멧돼지·개·늑대·호랑이·소·물소·고라니·쥐에 더해 꿩·오리 같은 새의 뼈도 발굴되었다. 사슴이 가장 많았고 멧돼지·개가 다음으로 많았다. 고고학에서는 사슴·멧돼지는 사냥감이고 개는 사육감으로 본다.

식물로는 도토리·가래(호두 비슷한 가래나무 열매)·솔방울·조가 나왔다. 당시는 솔방울도 먹었나 보다. 저장 구덩이도 90개가량 되었다.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등고선을 따라 포물선 모양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시 해안선이어서 바닷물이 구덩이에 들어왔다. 옛날 사람들도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을 도토리에서 없애는 데 짠물이 효과적인 줄 알고 있었다. 조는 불에 그을린 채 발견되었다. 농경의 산물인지 아니면 채집의 결과인지는 잘 분간되지 않는다.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

양·배수장은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가꾸었다. 발굴 현장을 재현해 놓았으며 발굴에 썼던 도구와 기록도 갖추었다. 토기는 대부분 진품이지만 재료가 나무·풀이거나 짐승뼈인 것은 복제품이 더 많다. 가래·도토리·솔방울·씨앗 등도 복제품이지만 옛날 느낌이 나게 해서 내놓았다. 진품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다. 토기 재료 흙은 썩지 않지만 나무·풀·뼈는 썩는다. 썩지 않도록 보존 처리하는 시설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다.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 발굴 현장 모형.

유수지는 흙으로 덮고 잔디를 깐 다음 호랑이·멧돼지·사슴 모형을 세웠다. 건물 겉면은 여기서 출토된 여러 토기 무늬와 멧돼지 모양을 재현해 놓았다. 잔디밭에 내려가면 마주 보이는 벽면에는 신석기인들의 모습, 들판에서 사냥하는 수렵과 바다·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로, 나무와 풀에서 열매나 씨앗을 거두는 채집도 나타내었다.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끌어당기는 현장감은 비록 적지만, 그래도 공간을 나름 그럴듯하게 꾸며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유적이 발견된 자리라는 장소성을 살려놓았다. 전시관에 제자리를 내어준 양·배수장은 맞은편 기슭으로 이사를 마쳤다.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은 오는 4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연다(관람료 없음).

흙으로 덮고 잔디를 깐 위에 몇몇 동물 모형을 들이세운 유물 발굴 현장.

습지의 원형과 인간 삶의 바탕

지금 전시관으로 바뀐 양·배수장과 유수지는 원래 논이었다. 대략 1000㎡ 정도 된다. 엄청난 유물이 발굴된 조개더미는 그러니까 요 조그만 넓이의 논바닥 아래에 있었다. 신석기시대 일대 지형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생겼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당시는 바다였다. 여기로 청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든다. 지금 청도천은 4㎞를 더 가야 낙동강과 만나지만 당시 청도천은 비봉리 유적까지만 민물이었다. 청도천은 비봉리 어귀에서 갑자기 넓어지면서 양쪽으로 편평한 저습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저습지가 바다와 만나는 경계선에는 모래톱이 길게 쌓였을 것이다. 지금도 두 흐름이 만나는 데서는 그와 같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긴 모래톱은 안쪽을 물결 잔잔한 호수처럼 만들었다.

벽면에 붙여 놓은 비봉리 사람들 어로 모습.

비봉리 신석기인은 이런 환경에서 살았다. 청도천에서는 잉어를 거두고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는 데서는 재첩과 꼬막을 잡았으며 갯벌에서는 조개를 캤다. 때때로 소나무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가 상어나 가오리도 잡았다. 비룡산·월봉산에서는 도토리·솔방울·가래를 따고 사슴·멧돼지를 사냥했으며 골짜기를 타고 내리다 부채처럼 펼쳐지는 선상지 들판에서는 조 같은 곡물 씨앗을 얻었다. 움막은 지금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따뜻한 남향 산기슭에 장만했을 테고.

옛날 상황에서 보면 비봉리보다 살기 편한 데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와 하천은 풍성한 먹을거리를 보장했을 뿐 아니라 안전한 교통로까지 제공했다. 천천히 흐르는 청도천 강물을 따라 남북으로 오갈 수 있었고 내륙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서 위험이 제거된 바다는 동서 방향 왕래를 손쉽게 해주었다. 토기는 물가에 지천으로 널린 흙을 빚으면 바로 되었고 움막이나 망태기를 만드는 데는 갯벌에 우묵했을 갈대 따위 풀들을 갖다 쓰면 그만이었다. 비봉리 유적은 인간의 삶이 습지에서 비롯되었음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낙동강 둘레 모두 편한 쉼터

비봉리보다 더 편한 삶터는 드물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데는 적지 않았다. 비봉리 사람들이 소나무 쪽배를 타고 건너다녔을 바다(지금 낙동강) 맞은편 창원 주남저수지 바로 옆에는 철기 시대 다호리 고분군이 있고 산남저수지 어름에는 합산패총이 있다. 비봉리에서 동남쪽으로 10㎞가량 떨어진 밀양 하남들판 한복판 백산에도 조개더미가 있다. 지금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는 밀양·창녕·창원 등지에는 이 밖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조개 더미가 수없이 많(았)다.

태풍 매미는 분명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이렇게 작으나마 선물도 하나 남겨주었다. 그림자만 있고 빛이 없는 경우는 언제나 없다. 비봉리 양·배수장이 태풍 매미로 물에 잠기는 바람에 갖은 중요한 유물을 발굴할 수 있었고 이것들은 이후 한반도 내륙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물에 젖은 습지였기 때문에 열매·씨앗·망태기·나무배·짐승뼈 따위가 수천 년 세월을 건너뛰어 썩지 않고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지만 그래도 품어보는 바람 하나. 전시관 옆 들판 논바닥 아래 지층은 비봉리 유적과 연장선에 있다. 논 전체는 늘려 잡아도 20만㎡다. 나라가 통째 사들여 발굴을 한다면 정말 귀중한 유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멧돼지무늬토기.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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