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2) 창녕 화왕산 용지
'4㎞ 이르는 둘레·풍요로운 물'
왜란 때 백성 지킨 화왕산성
배바우 전설·기우제 풍속 등 알찬 역사 이야기·유물 남겨

◇곽재우 장군과 창녕 화왕산

창녕에 가면 화왕산(火旺山·756m)이 있다. 남쪽 서쪽 북쪽이 모두 가파르고 동쪽은 다른 높은 산들과 이어져 있다. 산성이 사방을 대부분 두르고 있는 화왕산 정상부에 이르면 북쪽에 꼭대기가, 남쪽에 배바우가 솟아 있다. 홍수로 천지개벽이 되었을 때 배(船)를 묶어두었다는 배바우에는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 갈라진 틈이 있다. 곽재우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장소다. 곽재우는 1592년 4월 14일(음력) 임진왜란이 터지자 같은 달 22일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거름강(기강)나루와 정암(솥바위)나루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낙동강 기강나루는 의령과 창녕을 이어주고 남강 솥바위나루는 의령과 함안을 이어준다. 곽재우는 당시 물길을 타고 다니면서 의령·창녕·합천·고령·성산 등지에서 활약했다.

배바우 곽재우 전설은 5년 뒤인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과 관련되어 있다. 그해 7월 21일부터 화왕산성에 들어가 있던 곽재우가 왜병들한테 쫓겨 갈라진 틈으로 들어갔더니 저절로 넓어졌다가 지나간 뒤 다시 좁아져서 적병을 따돌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설을 보면 화왕산 일대에 왜적과 전투가 있었던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렇다. "방어사 곽재우가 화왕산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적병이 다가왔는데도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했다. 과연 하루 밤낮이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않고 강을 건너갔다." 화왕산성에서 밀양·영산·창녕·현풍 백성들을 거느리고 농성(籠城)을 한 것이다. 그러고 8월 15일이 지나 조정에서 철수를 명령하니 곽재우는 백성을 이끌고 산성에서 나왔다.

1982년(단기 4315년) 배바우산악회에서 새긴 화왕산성의병전승지비./공동취재팀

네 고을 백성이 함께 농성했으니 숫자가 줄잡아도 몇 천 명은 되었겠다. 화왕산성은 대단해서 둘레가 대략 4㎞에 이르고 넓이는 18만 5000㎡(5만6000평)이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데 필요한 것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옷가지나 먹을거리는 미리 갖다놓을 수 있었지만 마실 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화왕산성 한복판에는 그렇게 귀한 물이 몇 천 명 사람들이 날마다 마실 수 있도록 세 군데나 샘솟고 있었다.

함안 조남산 성산산성, 하동 양경산 하동읍성, 양산 영축산 단조성에도 샘이 있다. 하지만 화왕산성의 그것만큼 크거나 많지 않다. 당시 창녕에 쳐들어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은 '창칼이 햇살에 빛나고 깃발이 들판을 덮었으며 행렬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이 이어질' 정도였다. 곽재우 장군이 왜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보전할 수 있었던 1등공신이 바로 화왕산성 한복판 샘물이었다.

◇호랑이뼈가 발굴된 용지

화왕산성 한복판은 화산활동으로 자연스레 생겨난 분화구로 짐작되는 자리다. 사람들은 용지(龍池)라 일러 왔다. 옛날 사람들 눈에도 산꼭대기에서 물이 거꾸로 솟아나는 것이 신기했던지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둘레를 네모지게 돌로 쌓았다. 가야시대 쌓았다는 화왕산성이 함께 있으니 당연히 먹고 마시는 식수 구실은 톡톡히 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2003년과 2005년 발굴(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확인된 것은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비는 기우제(祈雨祭)였다.

용지 바닥 아랫부분 통일신라시대층에서는 세발솥, 1m 길이 칼, 놋그릇·구리그릇, 접시, 가위, 항아리, 다연(茶硏·차를 가는 기구), 수막새 기와 등 500점가량이 나왔다. 제사 의식과 관련있는 유물들이다. 윗부분 조선시대층에서는 호랑이·멧돼지·사슴의 머리뼈·턱뼈가 여럿 나왔고 몸통·다리에 해당되는 뼈다귀는 발견되지 않았다. 기우제를 지낼 때 목을 잘라 머리만 용지에 집어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화왕산에서 내려다본 창녕읍./경남도민일보 DB

왜 호랑이일까? 용지는 이름마따나 용이 깃든 자리였다. 용은 전설에서 하늘과 물을 오가면서 구름을 쥐락펴락하고 비를 내리거나 말거나 하는 영물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전설을 일상생활 속에서 진실로 믿었다. 용과 호랑이는 상극으로 용호상박(龍虎相搏), 용지에 깃든 용을 호랑이와 한판 뜨겁게 맞붙게 함으로써 비가 내리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건너편 언덕에 있는 '창녕 조씨 득성비'도 용지와 무관하지 않다. 신라 진평왕 시절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병에 걸렸다. 치료를 위해 화왕산에 올라 용지에서 몸을 씻었더니 아이를 배었다. 꿈에 신령이 나타나 아이는 용의 자식이며 태어나면 겨드랑이에 '조(曺)'라고 적혀 있을 것이라 했다. 예향이 몸을 풀고 나서 임금이 불러서 보니 모두 그대로였다. 그래 창녕 조씨 시조로 삼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했다.

◇억새 태우기 축제의 참극

화왕산성 안쪽 너른 평원은 용지 덕분에 억새로 가득하다. 억새는 물기를 좋아한다. 사철 물이 마르지 않으니 억새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은 이런 억새를 좋아하고 즐겼다. 창녕 산악인들은 화왕산과 배바우를 사랑하여 배바우산악회를 만들었다. 배바우산악회는 1971년부터 해마다 10월 첫째 토요일에 '화왕산갈대제'를 열었다. 10월 첫 금요일부터 사흘 동안 이어지는 비사벌문화제와 동시에 치러졌다. 산신제를 시작으로 산성 둘레를 통째 한 바퀴 돌면서 벌이는 횃불행진과 불꽃놀이가 장관이었다. 읍내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자하곡을 따라 가을바람 선선하게 맞으며 올라가면 지금도 구경할 수 있다.

화왕산 용지 부근. 버드나무와 진퍼리새가 있다./공동취재팀

전국에서 하나뿐인 야간산상축제이다 보니 전국에서 사람이 몰렸다. 창녕군에서 관광상품으로 욕심이 났나 보다. 화왕산갈대제는 그대로 둔 채 1995년부터 정월대보름날 화왕산성 억새평원을 불지르는 축제를 하나더 만들었다. 1996년과 2000년에 치러졌고 그 뒤로는 3년마다 한 차례씩으로 고정되어 치러졌다. 추운 겨울날 아닌 밤중에 1만, 2만 인파가 화왕산 꼭대기에 모여 억새평원이 활활 타오르는 불구경을 하는 엄청난 축제였다. 여기에 '억새 태우기는 정월대보름날 화왕산에 불기운을 들여 재액을 물리치고 평안과 풍년을 비는 세시풍속'이라는 억지 창작까지 더해졌다.

여섯 번째인 2009년 2월 9일 참극이 벌어졌다. 오고야 말 것이 오고 말았다. 저녁 6시 20분 억새밭에 불이 붙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돌풍이 일자 불길은 사람들 몰려 있던 배바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었던 옷은 눈깜짝 새에 불탔고 사람들은 불길에 떠밀리면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7명이 숨지고 81명이 다치는(4명은 중상) 참사였다. 화왕산 억새 태우기 축제는 다시 열리지 않게 되었다.

◇억새평원은 뭇 생명 보금자리

화왕산 억새평원은 이처럼 사람들 관광지고 놀이터였다. 사람들은 더 즐겁게 놀려고 억새평원에 불을 질렀다. 반대도 있었으나 '지역 경제 활성화' 목청에 눌렸다. 하지만 자연이 사람들 놀이터인 것만은 아니다. 화왕산 용지와 둘레 억새평원은 사람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식물까지 함께 어울리는 삶터라 해야 맞다. 사람들이 조금만 이렇게 여겼어도 5만6000평 너른 억새평원을 통째 불사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석축을 복원해놓은 화왕산 용지./공동취재팀
용지를 둘러싼 일대는 전형적인 습지다. 산기슭 개울가에나 있는 버드나무가 산꼭대기인데도 여럿 자라고 있다. 물이 질퍽한 데는 습지임을 일러주는 풀 진퍼리새가 무리지어 있다. 여기 물은 때로 붉은빛을 띠는데 진퍼리새와 여러 식물들이 생명을 다하고 스러져 산화(酸化)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쌓이고 다져지면 이탄층(尼炭層)이 된다. 화왕산 정상에는 물이 모이고 고이는 데가 용지 세 곳 말고도 더 있다. 동문 바깥만 해도 두 곳을 찾았다. 억새는 물 속에서 자라지 않으므로 이런 데에 없다. 대신 진퍼리새처럼 그보다 작은 풀이 자리를 잡는다. 억새는 물기를 머금을 정도 되면 딱 좋다.

억새평원은 짐승들 보금자리다. 용지를 비롯한 여기 물가에는 짐승 똥이 여러 곳에 있다. 수풀에 있다 나와서 물을 마신 흔적이다. 덤불에서 쉬고 머물고 잠자고 바람과 눈·비도 피한다. 덤불에는 새순·씨앗·벌레·잎사귀 등 먹이도 풍성하다. 억새 태우기는 이런 동물들에게 안방을 불태우고 이불을 걷어차고 밥상을 엎어버리는 패악질이었다.

8년 전 불길이 쓸고 지나갔던 용지 둘레 억새평원을 찾아 올라갔다. 예상한 대로 멀쩡했다. 탄내도 가셔져 있고 포기까지 타버린 갈대와 억새도 다시 무성해져 있었다. 숯이 되었던 찔레도 다시 자라나 있었다. 둥지를 잃어 떠나야 했던 새들과 토끼들도 돌아왔다. 뱁새는 덤불 사이로 낮게 날았고 꿩은 곳곳에서 푸드득거렸다. 토끼와 고라니 등의 똥도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화왕산 용지가 이처럼 동물·식물에게 생명선이라면 저 아래 자리 잡은 사람한테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밥줄이다. 화왕산 용지에서 솟은 물은 서쪽으로 흘러 창녕천을 이루고 남쪽으로 흘러 계성천을 이루며 북쪽으로 흘러 토평천을 이룬다. 창녕천·계성천·토평천은 낙동강으로 합류할 때까지 창녕 계곡과 들판을 이리저리 휘감아 흐른다. 그 유역에서 인간들이 논과 밭을 일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덕분에 창녕은 옛날부터 물산이 풍성했다. 청동기시대부터 가야 비사벌·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조선까지 갖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창녕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듯 용지에 크게 빚지고 있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습지 문화 탐방' 연재 날짜가 지면 사정으로 5월까지 매월 둘째·넷째 목요일에서 화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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