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안 사는 산골마을 사람들의 봄 소풍
나이도 아픔도 잊고 놀 수 있어 다행

새벽 5시 무렵에 잠을 깼습니다. 다른 날은 6시쯤 잠을 깨는데, 오늘은 마을 봄 소풍 가는 날이라 어린아이처럼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한 해, 딱 한 번 마을 노인회에서 가는 봄 소풍이라 저는 해마다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행사나 모임들이 도시처럼 미리 정해지는 게 아니라 날씨와 농사일에 따라 갑자기 정해질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마을 봄 소풍도 갑자기 정해진 것입니다. 하필이면 오늘 오후에 라디오 생방송이 잡혀 있는 날이라 부랴부랴 일정을 바꾸고 관광버스에 올랐습니다.

제가 사는 나무실 마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습니다. 두 개 마을을 다 합쳐도 마흔 명 남짓밖에 안 되는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오늘 봄 소풍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25명입니다.(참석하지 못한 분들은 몸이 아프거나 돈벌이 나가는 분들입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첫 번째 닿은 곳이 남해 금산 보리암입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만큼 이름난 보리암에 가려면 관광버스에서 내려, 보리암까지 태워다 주는 작은 버스를 다시 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작은 버스에 내려서 15분 남짓 오르막과 층계를 걸어가야만 보리암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방아실 아지매(할머니)는 마을 평지에서도 유모차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는 분이라 누가 업고 가지 않으면 보리암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며 지팡이를 짚고 이삼 분 남짓 걷더니 주저앉았습니다. 다른 아지매 몇 분도 숨이 가쁘다며 같이 주저앉았습니다. 맨 뒤에 따라가던 저는 아지매들이 쉴 만한 곳을 골라 앉혀 드리고 보리암까지 올라갔습니다.

'보리암에서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 하는데 어떤 기도를 드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부처님, 산골에서 한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온 아지매들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고 못난 제가 보기로는 아지매들이 지은 죄는 손가락이 휘고 어깨가 비틀어지고 무릎이 다 닳아 걷지도 못할 때까지, 자식들 살리느라 농사지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지매들을 어여삐 여겨 주시어, 제발 치매니 중풍이니 암이니 하는 이런 몹쓸 병만은 걸리지 말게 하시고 그냥 잠결에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지매들 소원은 그것뿐입니다.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때가 지났는데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병들어 누워 있으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먹고살기 바빠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아지매들 소원은 자식들한테 폐가 되지 않도록 잠결에 죽는 거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기도를 부처님이 꼭 들어주시리라 믿고 관광버스를 타고 삼천포로 가서 점심을 먹고,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고, 사천 백천사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관광버스를 탔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봄 소풍이 시작되었습니다. 좁은 관광버스 안에서 술잔이 오고가고 기사님이 틀어주는 음악소리가 사람들을 들뜨게 했습니다.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총각 한 명 빼고 나면 가장 젊은 놈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이 "서 선생, 한 해 단 한 번, 이렇게 모여 춤추고 노래 부르는 날인데 얌전빼지 말고 일어나."

서정홍.jpg

그 말씀을 듣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함께 놀았습니다. 거의 나이 칠팔십 넘은 분들이 흔들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어찌나 중심을 잘 잡고 춤을 추시는지 놀라웠습니다. 등이 90도로 굽은 아지매도, 무릎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한 아지매도, 내일모레면 마치 쓰러질 것 같던 아지매도, 놀 때는 신들린 사람처럼 '청춘을 돌려달라고' '사랑에 나이가 있냐고' 멋들어지게 잘 놉니다.

어둠이 내려서야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맑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산골 농부들이 한 해 단 한 번, 이렇게라도 한데 어울려 신나게 놀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서. 이런 자리라도 없으면 산골 농부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단하고 쓸쓸할까 싶어서.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