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선생의 얘기를 더 하기 전에 대통령 탄핵-파면과 관련하여 '양심'의 글을 한 편 보고 가자. 오래전 읽었던 빅토르 위고의 '양심'이란 단문과 페르난코르몬의 그림이다.

"짐승 가죽을 걸친 아이들과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을 새파랗게 질린 산발한 얼굴로 그는 신 앞에서 달아났다. 해 질 녘 그 암울한 사나이는 드넓은 광야의 산자락에 이른다. 지친 아내와 숨 헐떡이는 자식들은 말한다. '이 대지에 누워 잠자고 싶어요' 그는 잠 못 이루고 산기슭에서 머리를 들어 불길한 하늘 저 깊은 곳을 상상한다. 그러자 어둠 속에 크게 부릅뜬 눈 하나가 나타났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는 말한다. '아! 아직 너무 가깝구나'"

사람의 맘속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도덕적 의식은 누가 가르쳐주고 배워 생겨난 것이 아니다. 불교 공안(公案)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처럼 미리 생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양심(良心)이라 한다. 다석의 표현대로라면 '속알'이라 하고 유교로는 성(性)이나 덕(德)에 가깝다. 그림에 나타난 산발한 사나이는 신을 피해 달아나지만- 죄를 짓고 감추려 하지만- 바로 머리 위에서 부릅뜬 눈을 보고는 너무 가깝다고 탄식하는데, 부릅뜬 눈은 바로 양심의 눈인 것이다. 이를 보면 신이 내재(內在)해 계신 것은 분명한데 대문호의 양심의 묘사가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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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코르몬의 그림.

남강은 1910년 12월 안명근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제주도에 유배된다. 이어 데라우치 총독 살해음모 사건으로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1915년까지 5년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또 4년간 감방생활을 하다가 1922년 7월 33인 중 마지막으로 출옥했다.

"감옥서 어떻게 그리 기쁜지 몰랐어요. 하느님 당신께서 내 머리 위에 계신 것 같았어요. 내가 성경을 가까이 한 곳은 감옥에서였어요. 젊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감방 똥 청소를 자진해서 도맡았어요. 손으로 똥을 치우며 기도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감옥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똥통 소제한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라 했다오. 감옥이란 이상한 데예요. 강철같이 강해져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같이 푹 약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남강의 감옥 생활 후기를 보면 먼저 기쁨이 용솟음쳤다고 한다. 옥살이가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감옥서도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신앙이 그이를 기쁘게 한 것이고, 그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다는 그 믿음이 그를 춤추게 한 것이다. 똥통 청소를 도맡았다는 남강, 그리고 손으로 똥을 치우며 그가 올린 기도는 '부활(復活)'을 겪지 아니한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얘기다. '감옥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해 가장 밑바닥 일을 도맡았던 이 마음이 변치 말게 해주십사' 한 그 말씀, 혹여 마음에 변절이 오지 않도록 기도한 마음은 차라리 눈물겹다.

다석은 고당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으로 추대된다. 그때 32살이었다, 교단을 떠난 지 11년만인 1921년 9월 7일 취임했다. 오산학교에서 2년 넘게 교단에 함께 섰던 춘원 이광수는 유영모를 '시계처럼 공정하고 정확한 사람'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자기 방 청소도 손수 하고 방에 군불도 직접 땠다. 남에게 일을 시키기 좋아하는 건 몹쓸 양반 놀음이라고 했다.

다석은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싫어했다. 그것을 '몹쓸 양반 놀음'이라고 했다. 선비는 선비의 생각을 실천하는 사람이지 양반 놀음에 빠져 남을 하대(下待)하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양반들은 양반놀음에 빠져 나라를 망쳐버렸다.

백성을 교육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한 도산 안창호, 도산한테 배워 오산 학교를 세운 남강, 그의 추천으로 교장이 된 다석, 서로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연결되어 있다.

다석은 일제의 반대로 오산학교 교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1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때 졸업반 학생이었던 함석헌을 만나 평생 사제(師弟) 교분을 나누었다. 두 사람 사이의 얘기가 많지만 하나만 들어보자.

"오산에 오신 지 오래지 않아서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이란 것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어서, 유하시는 방문 앞까지 가서 문고리를 잡기까지 했었지만, 들어가면 무슨 말을 어떻게 여쭈어야 할까 그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일도 있습니다. … 한 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 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아마 한 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三萬里 야정해도삼만리'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왕양명(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이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을 읽어볼 양이면 문체가 아주 여성스럽다. 문체로만 보면 군주를 그려 하는 신하의 노래인 옛시조 사미인곡(思美人曲) 같다.

겨울날 따스한 볕을 임 계신 데 비추고자/ 봄 미나리 살진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 임이야 무엇이 없을까마는 내 못 잊어 하노라

노산의 시처럼 사랑 노래 같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 졌습니다

강건하기 그지없던 분이었지만 스승 앞에서는 부끄러운 진달래가 되었다.

夜靜海濤三萬里. 왕양명의 시도 한 번 음미해보자. 젊은 유영모가 써서 붙인 글이기에 더 알고 싶다. 글귀를 해석하면 '밤은 고요한데 바다의 물결은 끝이 없다'는 뜻 같은데, 태허(太虛)의 우주는 말없이 있지만 그 속의 피조물은 끝없이 약동하고 있다는, 존재와 현존재(現存在)를 상징하는 시임에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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