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의 산 : 풍요의 땅 비사벌을 지키고 선 산들
사천의 산 : 바다 벗 삼아 용솟다

풍요의 땅 비사벌을 지키고 선 산들

창녕의 산 

창녕군은 합천·의령·함안·창원과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남강,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동쪽 산맥이 밀양과 접경하고 있다. '풍요의 땅' 비사벌을 호위하듯 우뚝 솟은 창녕의 산군(山群)은 화왕산(火旺山·756m)을 중심으로 관룡산, 구현산, 쌍교산. 영산면과 부곡면을 아우르는 영축산(682m), 함박산, 종암산, 덕암산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들판을 가로질러 다양한 전설을 품은 대합면 태백산과 이방면 구룡산이 있다.

창녕의 진산이자 주산인 화왕산은 약 18만 5000㎡(5만 6000여 평)에 이르는 억새초원이 압권이다. 황금빛 억새 물결과 연분홍빛 진달래 군락이 아름다운 화왕산은 드라마 촬영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용선대가 있는 관룡산도 화왕산과 함께 찾는 이가 많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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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왕산 창녕읍쪽 전경. / 유은상 기자

창녕 산을 제대로 느끼려면 구간 산행과 종주 산행을 권한다.

먼저 화왕산~관룡산(계성면 옥천리~723 암봉~배바위~화왕산~관룡산~용선대~관룡사·산행시간 5~6시간) 코스, 화왕산~부곡온천(배바우산장~화왕산~관룡산~669봉~심명고개~영축산~보름고개~종암산~큰고개~부곡온천·10시간) 코스, 영축산~종암산(영산~보덕암~677봉~영축산~병봉~보름고개~종암산~큰고개~부곡온천·6~7시간) 코스, 함박산(함박약수터~함박산~종암산~큰고개~덕암산~삼방고개~부곡온천·5~6시간) 코스가 있다.

창녕읍과 영산면에 산재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은 역사탐방으로 손색없다. 여기에 더해 산행 후 피로를 말끔히 씻을 수 있는 부곡온천도 창녕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까.

옛 지도·문헌 속에 담긴 창녕 산 이야기

위성지도를 보면 창녕은 명확하게 동서로 나뉜다. 동쪽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맥이다. 서쪽은 창녕을 서남쪽으로 에도는 낙동강을 향해 부챗살처럼 펼쳐진 들판이다. 산과 들판의 경계가 선명해 칼로 잘라 놓은 것 같다.

동쪽 산은 장수처럼 우뚝해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나 5번 국도를 따라가면 그 웅장한 위세가 실감 난다. 능선이다 싶으면 곧 아찔한 암벽이고, 암벽이다 싶으면 다시 능선이다. 산악인들은 이를 '화왕지맥'이라 부른다. 이 지맥을 거느린 것이 창녕을 대표하는 화왕산이다.

조선시대까지 창녕지역은 남북으로 독립된 두 개의 고을이 있었다. 창녕현과 영산현이다. 창녕현은 창녕읍, 고암면, 대지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을 포함하며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는 창녕읍 교상리, 말흘리 일대였다. 영산현은 남지읍 남부, 영산면, 계성면,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읍내리, 성내리 일대였다.

옛 지도로 본 창녕산

창녕현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화왕산(火旺山·756m)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 그려진 화왕산은 지나치게 기골이 장대하다. 고을의 진산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웅장하게 그린 것이다. 지도에는 화왕산성과 성문, 용담이란 연못도 보인다.

예로부터 화왕산을 상징하는 것은 불이었다. 화왕산성이 둘러싼 억새평원은 화산 분화구였다. 하여 화왕산은 불구덩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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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바위에서 본 화왕지맥. / 유은상 기자

풍수에서도 화왕산을 불이 타오르는 모습이라 해 화산(火山·뾰족한 산)으로 해석한다. 그래서일까. <1872년 지방지도>의 화왕산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인다.

신라시대에는 창녕 지역을 비사벌로 불렀는데, 이는 우리말 빛에서 나온 말이다. 비사벌은 한자로 화왕(火王)이라 적었다. 그야말로 불구덩이 산이다. 화왕(火王)을 언제부터 화왕(火旺)으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19세기 이후 일제강점기에 왕(王) 자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화왕산의 임금 왕(王)자를 성할 왕(旺)자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1750년에 제작한 <해동지도>에도 화왕산(火旺山)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근거는 아닌 것 같다.

화왕산 옆 관룡사가 있는 산은 대이산(大耳山)으로 돼 있는데, 오늘날 관룡산(觀龍山·754m)을 말한다. 19세기 전반에 만든 <광여도>는 화왕산을 대왕산(大旺山)이라 적고, 화왕산성을 고성(古城)이라고 표현했다. 또 <해동지도>는 관룡산을 구룡산(九龍山)으로 적어 다른 지도와 차이가 난다.

옛 지도로 본 영산산

영산현의 진산은 영취산(靈鷲山·681m)이다. 사람들에게는 영축산으로 불린다. 영축산의 옛 이름은 취산(鷲山) 즉 '수리 뫼(독수리 산)'다. 이는 고대인이 높고 신령스러운 산에 주로 붙이던 이름이다. 이후 불교가 전해지면서 취산이 영취산으로 바뀐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역 승려 지공(指空)이 이 산이 천축(天竺·인도)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다 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영취산(혹은 영축산)은 부처가 마지막으로 죽을 때까지 설법을 했다는 산이다. 설법하던 장소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한다. 영산현의 '영산'도 여기서 비롯한 듯하다.

여러 조선지도가 읍치를 사이에 두고 영취산과 마주한 작약산(芍藥山)을 그려 놓았다. 오늘날 함박산(500m)이다. 지도에서는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사실 영취산과 이어진 한 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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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성. / 유은상 기자

함박산의 옛 이름은 '크게 밝은 뫼'다. 산봉우리가 마치 해나 달처럼 둥글게 잘 생긴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여기서 '한밝 뫼'로, 다시 함박산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로는 한밝과 음이 비슷한 함박꽃 작(芍)을 써서 작약산이라 옮겨 적은 듯하다. 요즘에는 산에 함박꽃이 많다고 함박산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함박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는 위장병에 좋다 하여 예로부터 이름이 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영산 약천(藥泉)'이라 하여 신라시대 효성 지극한 나무꾼이 약수로 어머니 위장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영산 사람은 고을을 둘러싼 영축산과 함박산을 모두 신령스럽게 대했다. 영취산 정상에는 북악기우단(北嶽祈雨壇)을, 작약산 정상에는 남악기우단(南嶽祈雨壇)을 만들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옛 기록이 그 증거다.

태백산과 구룡산

창녕의 산세가 주로 동쪽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서쪽에도 유래가 깊은 산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대합면에 있는 태백산(太白山·285m)과 이방면에 있는 구룡산(九龍山·209m)을 살펴보자.

태백산은 벌판 한가운데 우뚝한 대합면의 주산이다. 중턱에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 옛 이름은 합산(合山).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해동지도>를 빼곤 대부분 태백산이나 태백산 봉수로 기록했다. 태백산이란 이름은 함박산과 같은 '한밝뫼'에서 나왔는데, 대합면 사람들이 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하고 민족의 영산과 같은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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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평원이 화왕산 대표 풍경이라면 구룡산은 칼날처럼 솟은 암봉들이 일품이다. / 유은상 기자

구룡산은 대합면과 이방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름에서 보듯 용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까마득한 옛날, 이 산에서 10마리 용이 승천하려고 3000년간 수련을 했는데, 이 중 9마리(九龍)가 무사히 여의주를 얻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용이 9마리나 승천한 산이라 그 기운이 남달랐나 보다. 이 산의 정기를 받은 주변 고을에 진사(進士)가 9명이 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병이 이 산에서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 하여 산허리 혈을 끊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왜병이 이 산에 훈련소를 지어 태백산에서 구룡산으로 연결되는 기운을 끊으려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하지만, 10마리 용 중 한 마리는 아직도 이 산을 떠돌며 승천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 용이 여의주를 얻는 날이 땅에 큰 인물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억새물결 그 이상의 풍경 '화왕지맥'

통영 대표 음식 하면 '충무김밥'이 떠오른다. 통영에 가면 왠지 충무김밥을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른 맛 난 음식이 많은 데 말이다.

창녕의 산 하면 화왕산(火旺山·756m)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어서 억새가 연상된다. 그래서 화왕산은 꼭 늦가을에 억새를 보고자 올라야 하는 산으로 느껴진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짜장면을 시키려고 하면 짬뽕이 더 맛있을 것 같고, 짬뽕을 먹고 나면 짜장면을 시킬 걸 하는 후회를 흔히 하게 된다. 이럴 때에 맞춰 나온 메뉴가 '짬짜면'이거나 '세트메뉴'다.

늦가을이 아니지만 창녕의 산을 찾아 억새풍경 그 이상을 느끼고 싶을 때 가는 코스가 화왕산∼관룡산(觀龍山·754m)∼구룡산(九龍山·741m)으로 이어지는 '화왕지맥'이다. 산객이 붙인 이름이지만 사계절 내내 창녕산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세트메뉴인 셈이다.

장르가 다른 화왕산

화왕산은 창녕읍과 고암면에 걸쳐 있다. 산정 평원은 둘레가 대략 4㎞에 이른다. 경계면을 따라 가야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화왕산성이 있다. 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분전지로 알려졌다. 창녕읍 쪽 서쪽에는 목마산성(사적 65호)이 잘 보존돼 있다.

정상 평원 내부에는 약 18만 5000㎡(5만 6000여 평)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3년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억새 태우기 행사가 열렸지만 2009년 인명사고가 발생해 폐지됐다. 남문 터 쪽에는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화왕산 절정은 억새가 만발한 늦가을이지만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피고 여름이면 초록 억새가 눈을 싱그럽게 한다. 겨울에도 꽃이 다 떨어져 나간 억새 줄기가 전혀 앙상하거나 애처롭지 않다. 오히려 바람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놓은 것처럼 더 정갈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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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정상 표석./유은상 기자

이러한 경치도 화왕산 자체의 이색적인 산세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고만고만한 풍경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화왕산의 비교우위는 산세에 있다.

우리나라 산 대부분은 바다나 육지가 솟아오른 뒤 침식되면서 형성됐다. 반면 화왕산은 백두산, 한라산처럼 화산 분화구였다. 태생이 다르니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다. 녹음이 짙은 계절에는 목초지가 펼쳐진 유럽 고원지대 느낌이 있고, 겨울에는 제주도 오름의 풍경이 배어 있다. 산은 기암절벽이 빼어난 곳, 정상 조망이 뛰어난 곳, 계절별 꽃이 유별난 곳, 바다 풍경을 즐기는 곳 등 각각의 특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화왕산은 장르가 다르다. 도내에서는 그나마 황매산(黃梅山, 합천·산청, 1108m)이 유사한 풍경을 가진 듯하다.

관룡산·구룡산

화왕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산이 관룡산이다. 화왕산성 동문∼허준 드라마세트장∼옥천삼거리를 따라 완만한 임도를 40분가량 걸으면 정상에 이른다. 다시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그때부터는 예사롭지 않은 암릉을 마주하게 된다. 바위 절벽 오르고 내리기를 30분가량 하면 다시 구룡산에 닿는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관룡산과 구룡산은 따로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 불린 것으로 보인다. <해동지도>에는 구룡산으로, 화왕산 오른편에 바로 표기돼 있다. <여지도서>에는 필봉으로 기록됐고, <1872년 지방지도>에는 대이산(大耳山)으로 나타난다. 지금은 봉우리마다 제 이름이 새겨진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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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룡사 뒤편에 펼쳐진 병풍바위. / 유은상 기자

구룡산(관룡산)은 원효대사와 얽힌 전설이 남아 있다. 원효대사와 제자들이 백일기도를 마친 날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화왕산 꼭대기 삼지에서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났다. 이 용들은 영롱한 오색구름을 타고 날다 구룡산 쪽에서 승천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절 이름을 관룡사로, 그 뒷산은 구룡산이라 했다 한다.

관룡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벼랑 위 바윗길 연속이다. 쭉쭉 갈라져서 하늘로 치솟는 바위들이 즐비하다. '창녕의 금강산'으로도 불린다. 칼날 같은 벼랑 위를 네발로 오르내리는 등산 묘미도 만만치 않다.

이 일대 바위 구간을 병풍바위라 일컫는데 관룡사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구름이 낀 날에는 이들 봉우리가 마치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처럼 보였을 것이다. 절 이름이 관룡사로 붙여진 이유가 쉽게 짐작된다.

경치도 문화재도 화려한 관룡사

관룡사는 관룡산과 구룡산 부속 사찰의 느낌이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수많은 문화재와 빼어난 주변 경치를 지녀 굳이 산행을 하지 않고 다녀가도 알찬 곳이다.

통도사 말사인 관룡사는 신라 내물왕 39년(394년)에 창건했다는 설과 진평왕 5년(583년)에 증법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삼국통일 후에는 원효대사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했던 도량이라고도 한다. 조선 태종 1년(1401년)에 대웅전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임진왜란 때를 비롯해 몇 번이나 소실되면서 재건과 보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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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왕산 <허준> 드라마세트장. / 유은상 기자

관룡사는 보물 제212호 대웅전, 보물 제164호 약사전, 보물 제519호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4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 경남민속자료 제6호 관룡사 석장승과 관룡사 해태 법고 받침 등의 독특한 문화재도 눈길을 끈다.

특히 용선대 불상은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입학, 취업시험 합격 등을 비는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용선대는 극락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비유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전망 또한 도심에서 쌓인 체증과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어쩌면 그 순간이 짧은 극락일지도 모른다.

옥천매표소를 지나 관룡사로 오르는 길 오른편에는 신돈(?∼1371)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玉泉寺)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임을 당하자 절도 폐사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로 이 옥천사에서 신돈이 태어났다.

신돈은 고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강제로 노비가 된 이들을 해방하고자 토지제도와 노비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민족의 자주성을 주창했다. 결국 친원 권문세족과 부패 불교 세력의 반발로 신돈의 개혁은 좌절되고 역모죄로 처형당하게 된다. 신돈은 역사의 승리자에 의해 결국 무모하게 개혁을 이끌다 나중에는 주색과 권력을 즐긴 '요사스러운 중'으로 기록됐다.

찾는 이 없어 우거진 숲속에는 석재만이 나뒹굴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더구나 부도, 석등 등 석재 대부분이 잘게 부서져 있어 인위적으로 파손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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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룡사 해태법고받침. / 유은상 기자

바다 벗 삼아 용솟다

사천의 산 

사천시 지형도를 들여다보면 두 곳의 산군(山群)이 뚜렷하다. 하나는 사천시 벌리동 와룡산을 중심으로 한 봉우리들이다. 와룡산에서 남북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들이 사천시의 중요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사천 지명과 관련 있는 정동면 이구산(379m)도, 고려 현종의 전설이 깃든 흥무산(455m)과 구룡산(384m)도 이 줄기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천시 곤명면 봉명산 군립공원과 그 주변 봉우리들이다. 역사 오랜 다솔사를 품은 봉명산(407m) 산군으로 지리산 지맥을 직접 이어받았기에 방장산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봉명산 산군 주변은 예로부터 제왕이 날 땅이란 설이 있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을 이곳에 세운 이유다.

조선시대 사천은 사천 고을과 곤양 고을로 나뉘어 있었다. 와룡산 산군의 용(龍)은 사천 고을을 에돌아 꿈틀거리고, 봉명산 산군의 봉황(鳳凰)은 곤양 고을 위로 그 큰 날개를 퍼덕였다. 지금 사천이 항공산업의 중심지가 된 것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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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길' 벼랑을 이룬 와룡산 정상 새섬봉에 서면 아름다운 풍경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유은상 기자

지리산 기운 깃든 '천혜 명당' 사천의 산들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수양공원은 꽤 운치가 있어 걸을 맛이 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사천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 길을 돌아 전망대에 오르면 사천읍내와 그 너머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사천은 지금의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을 포함하는 고을이었다. 고을의 진산(鎭山·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동쪽에 있는 두음벌산(豆音代山·210m)이다.

사천 고을의 진산, 두음벌산

조선시대 지도와 지리서는 두음벌산과 함께 두음산(豆音山) 혹은 두벌산(豆伐山)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부봉산(浮蜂山)이란 이름도 나온다. 벌이 나는 모양이어서라는 견해도 있고, 두음벌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사천읍 주변 노인들은 '뚬벌산'이나 '뚬벙산' 같은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비슷한 자리에 정령산이라고 표시된 것이 있는데, '뚬벙산은 풍정마을 뒷산'이라는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산이 바로 두음벌산인 듯하다. '두음벌'은 옛 사천 고을을 이르던 이름이다. 비사벌(창녕), 미리벌(밀양)과 같은 옛 가야국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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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읍성. / 유은상 기자

조선시대 지도 중에는 두음벌산 자락에 옥산(玉山)을 표시해 놓은 게 더러 있다. 풍정마을 앞에 있는 작은 언덕인데, 옛날에는 활을 만들던 시누대(箭竹)가 많은 산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 산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70년대 옥산에서 흙을 퍼다가 사천 비행장 공사 매립토로 썼다. 이후 도로를 만들면서 옥산은 그 형태를 완전히 잃었다. 지금은 산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천 지명 발생지

사천시 정동면 고읍리는 너른 들판을 거느린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사천읍, 남쪽으로는 사천강을 경계로 한다. 이름 그대로 '고읍(古邑)', 옛 고을이다. 세종 27년(1445년) 이전까지 사천 고을의 읍치가 이곳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후 읍치는 지금의 사천읍 정의리, 선인리 일대로 옮겨진다. 현재 사천읍성이 있는 자리다.

고읍리에서 사천강을 건너면 성황당산(城隍堂山·209m)이다. 성황당 또는 서낭당은 마을과 토지를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장소를 말한다. 산 위에 산성이 아직 남아 있는데, 성황당산성 혹은 고읍성으로 불린다. 현재 경남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산 이름이나 산성이 있는 것을 볼 때 고읍 마을이 사천의 읍치였을 시절에는 성황당산이 고을 진산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황당산 능선은 바로 이구산(尼丘山·379m), 능화봉(陵華峯·285), 흥무산(興霧山·455m)으로 이어진다. 지맥이 와룡산에서 뻗어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흥무산에서 시작해 성황당산에서 끝나는 산세다. 이구산은 옛 지도에 니산(尼山)으로 나온다.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선 곡부시에 있는 니구산과 같은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사천강은 옛 지도에 사수(泗水)나 사천수(泗川水)로 나오는데 역시 곡부에 있는 강이름과 같다. 이는 옛 유학자들이 공자를 높이 받들고 유학(儒學)을 일으켜 세우려고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사천이란 지명이 나왔다.

삼천포의 산들

삼천포 바닷가에 우뚝 솟은 각산(角山·408m)은 문자 그대로 산이 용의 뿔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부분 조선 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이 각산을 표시한 사실과 각산산성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보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 있는 각산봉화대는 경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남쪽 봉우리에는 마찬가지로 경남도 문화재자료인 각산산성도 있다. 산 정상에서 남해군 쪽으로 보는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현재 삼천포대교가 이어진 초양도에서 바다를 건너 각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바다 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다.

각산에서 삼천포항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망산(望山·61m)으로 불리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지금은 망산공원 혹은 선구공원으로 불린다. 이름 그대로 옛날에 망루(望樓)가 있어 왜구가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했다고 한다. 낮아도 정상에 서면 삼천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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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양도에서 바라본 각산./유은상 기자

옛 곤양 고을의 진산, 동곡산

조선시대 곤양은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 일대, 하동군 진교면, 금남면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곤양은 한때 남해군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 해 1419년 곤양 마을에 태실(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곳)을 짓고 남해군을 합쳐 곤남군으로 승격했다. 이때 읍치가 지금 곤명면 금성리다. 이후 1437년에 남해군을 분리하고 곤양군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읍치는 지금 곤양면 성내리 주변이다. 곤양 고을의 진산(鎭山)은 읍치 북쪽 동곡산(銅谷山)이다. 지금은 이 지명을 쓰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도에 그려진 산맥과 현장 답사를 통해 볼 때 곤양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성내공원이 있는 산이 동곡산인 듯하다.

조선시대 곤양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행정구역이 현(縣)보다 한 단계 높은 군(郡)이었다. 이는 세종대왕의 태가 안치된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곤양땅은 지리산 정기가 이어지는 천하명당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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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 태실지./유은상 기자

천하명당을 이룬 산세

생거하동 사거곤양(生居河東, 死居昆陽) 설도 전한다. '살아서는 하동 땅에 살고, 죽어서는 곤양 땅에 묻혀야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만큼 묘를 쓸 자리로 좋다는 말이다. 이 중심에 소곡산(所谷山)이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 소곡산은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옥산(玉山·614m)에서 시작해 사천시 곤명면 송림리 송비산(松飛山·243m)으로 이어지는 줄기 중간에 있다. 요즘 지도에는 지명이 없는데, 현재 세종대왕태실지가 있는 산인 듯하다.

제왕이 나올 산세는 또 있다.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이명산(理明山·572m)에서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400m)으로 이어지는 산세다. 이명산 산하 십 리 안에 만군을 호령할 천자가 나오고 미래 세계를 이끌어갈 현량들이 모여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도량이 생길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지기(地氣)를 죽이려고 일제가 봉명산과 이명산 근처에 쇳물을 끓여서 부었다는 말도 전한다. 봉명산은 지리산과 같은 방장상(方丈山)으로 불릴 만큼 지리산 명맥이 이어진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 지리산의 기운을 받는 자리에 천년고찰 다솔사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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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전망이 시원하다. 오른편에는 상사바위, 산 아래에는 와룡저수지, 왼쪽 저 멀리에는 삼천포 시가지와 한려해상이 아스라이 보인다. / 유은상 기자

가깝다 쉬이여기지 말라 저 능선도 사람도

사천을 대표하는 산을 추천해달라니 곧장 "와룡산(瓦龍山·801m)"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명성은 덜하지만 숨은 가치를 가진 산을 소개해 달라고 하니 "와룡산에는 가봤느냐"는 말이 다시 돌아온다. 닥치고 와룡산부터 가보라는 뜻이겠다.

와룡산은 지역의 진산이자 명산이며 사천이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산이다.

산 이름에 용(龍)이 들어간 곳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대구, 안동 등에도 와룡산이 있다. 산마다 개성이 있어 굳이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감히 잣대를 댄다면 사천 와룡산은 여러 면에서 단연 수위에 꼽힐 것이다.

승천을 기다리며 엎드린 용

와룡산은 사천시 사천읍, 사남면, 용현면, 남양동, 벌용동, 용강동에 걸쳐 있다. 하늘에서 보면 바다를 향해 용강동 쪽에 머리를 두고 U자형 말발굽 모양으로 꼬리를 접어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용이 누워 있는 산' 와룡산으로 불린다.

문헌을 확인하면 대부분 산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이 몇 번 바뀐다. 그러나 와룡산은 변함없었다. 누가 봐도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생김새 때문에 얻은 이름이지만 묘하게 역사적인 내용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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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산 새섬봉. / 유은상 기자

와룡산 골짜기에는 와룡사라는 절이 있었다. 지금도 와룡사지로 추정되는 터가 와룡마을에 있다. 이 절에는 고려 8대 왕 현종(992∼1031)이 임금이 되기 전 머물던 곳으로 전해진다.

<신동국여지승람> 기록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 왕욱(王郁)이 있었다. 욱은 조카 경종의 부인 헌정왕후와 정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된다. 이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면서 욱은 와룡산 기슭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임종을 앞둔 욱은 아들 현종에게 '나를 고을 서낭당 남쪽 귀룡동에 엎어서 장사하라'고 당부한다. 나중에 아들 현종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를 효목대왕으로 추대한다. 결국 아들은 살아서 왕이 되고 자신은 죽어서 왕으로 추대받으니 엎드린 용이 승천한 셈이다.

용 등에 올라 바다로

와룡산은 높고 낮은 봉우리가 아흔아홉 개 있다고 해서 구구연화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용의 머리-등-꼬리 순으로 거북바위, 사자바위, 기차바위, 민재봉, 새섬봉, 상사바위가 쭉 이어진다.

산지 대부분은 육산으로 완만하지만 주 능선에는 희고 우뚝 솟은 화강암 봉우리가 이어지면서 웅장한 산세를 연출한다. 능선을 따라 산행하는 동안 한려수도의 시원한 조망이 계속 뒤따른다. 그 경치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용의 등에 올라타고 바다로 향해 날아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특히 용의 등 비늘같이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며 솟아오른 (801m)을 오르내리는 동안이 클라이맥스다.

반대로 민재봉(798m)은 푸근한 느낌이다. 그동안 민재봉이 와룡산의 대표 봉우리로 알려졌지만 2009년 국립지리원의 해발고도 정정으로 정상의 자리를 새섬봉에 내줬다.

하지만 와룡산 가운데 허리 지점에 있어 오른쪽 새섬봉 쪽과 왼쪽 기차바위 쪽으로 팔을 뻗은 산세와 발아래 와룡마을과 와룡저수지, 그리고 멀리 점처럼 흩어져 있는 사량도, 신수도, 수우도, 늑도, 창선도, 남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4월과 5월 진달래와 철쭉이 봉우리를 덮으면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와룡산 철쭉은 '사천 8경'에도 꼽힌다. 철쭉이 필 즈음 이곳에서는 전국등반대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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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산 등산로. / 유은상 기자

'겸손' 깨달음을 주는 산

와룡산 산행길은 용머리 쪽인 와룡저수지에서 출발해 기차바위∼민재봉∼새섬봉∼상사바위 종주코스와 와룡마을 산불감시초소에서 덕룡사∼기차바위∼민재봉∼새섬봉∼도암재∼와룡마을로 회귀하는 축소코스가 대표적이다.

등산로 입구 와룡저수지 쪽에 서면 양쪽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능선까지 오르는 것도 금방이면 될 듯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착시에 따른 착각임을 깨닫게 된다. 가깝게 보였던 주 능선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높다. 역시 등용문이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니 이번엔 처음 밑에서 봤던 것보다 더 멀리 높이 올라온 듯 느껴졌다.

순간 세상 사는 이치가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자신이 한없이 높게 여겨져 쉽게 거만해지고, 밑에서 위를 보면 생각보다 그 경지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져 만용을 부리거나 실수하는 것처럼….

반대편 능선에서 보면 민재봉과 새섬봉도 한달음에 달려 도착할 수 있을 것처럼 잡힐 듯하지만 지척에 두고 둘러가야 하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 한쪽까지의 거리만 생각해 잘못 계산한 때문이다. 종주에는 7시간가량, 축소코스는 대략 5시간 걸린다. 와룡산을 오르며 다시금 '겸손'을 배우게 된다.

사천 선상지, 한반도서 귀중한 지질연구 단서

사천 와룡산 일대는 지질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귀한 선상지(扇狀地·Alluvial fan)가 산 아래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선상지는 말 그대로 부채모양으로 펼쳐진 땅을 일컫는다. 경사가 급한 계곡을 흐르던 물이 완만한 지형을 만나 느려지면서 자갈이나 모래를 부챗살처럼 펼쳐놓은 지형을 말한다.

사천 선상지는 와룡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백천에 의해서 형성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충적 선상지다.

노년기 지형인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다. 강원도 강릉의 금강평 선상지, 전남 구례군 화엄사 선상지, 경북 경주 선상지 등 몇 곳이 있지만 사천 선상지가 가장 뚜렷한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반도 제4기 환경변화를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큰 의미를 띤다.

사천 선상지는 와룡산 서쪽 완사면 아래 용현면 덕곡리 덕곡저수지에서 시작해 사천만 쪽인 용현면 주문리와 대포동, 노룡동 일대로 펼쳐진다. 길이는 2㎞, 너비는 3㎞에 이른다. 선상지 지면이 경사는 2도 내외로 평평해 주로 농경지로 이용된다.

부채꼴 지형 시작지점인 선정지역과 가운데 부분인 선앙 지역은 자갈과 큰 입자 퇴적물이 많다. 지형이 거칠어 오래전 황무지였지만 덕곡저수지가 생기면서 농토로 이용됐다.

끝부분인 선단 지역은 미립자물질이 쌓여 농사짓기에 좋고 또 선정·선앙 지역에서 땅 아래로 스며든 물길이 솟아오르면서 주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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