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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보던 가야 유적 여기 다 있네"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1) 창녕
양덕중, 지석묘·석빙고 등 보며 선조 삶 엿봐
해설·미션 수행 통해 고장 사랑하는 맘 생겨

2017년 05월 10일(수)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경남도민일보>가 청소년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에 나섰다. 경상남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2013년부터 해마다 하고 있다. 중·고교에서 신청을 받아 선착순으로 스물여덟 학교를 선정했다. 탐방 지역을 선택하게 했더니 창녕·거창·합천·통영·김해·거제·밀양·고성·함양·진주·창원 11곳이 나왔다. 지역별로 열한 차례 탐방을 소개한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동네와 지역의 역사·문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국가와 세계의 역사·문화는 가르친다. 동네와 지역의 개별성·구체성은 알 길 없고 동네-지역-국가-세계 사이의 복잡다양한 연관성은 숨겨진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역사·문화 교육을 동네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넓혀간다고 한다. 총체성·연관성은 물론 개별성·구체성까지 살릴 수 있다.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은 이런 간극을 좁히자는 데 목적이 있다. 너무 어리면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고 스무 살 넘으면 제도 교육의 굳어진 논리에 갇히기 십상이다. 10대 중·후반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누비는 것은 이래서 소중하다. 체험과 감동은 평생 잊히지 않는 DNA가 되어 몸에 새겨진다. 고장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여기서 싹이 튼다.

창녕 탐방은 세 학교가 함께한다. 첫 나들이는 5월 2일 양덕중학교 학생들이었다.6월 3일과 9월 9일에는 마산공고와 의령여중 친구들이 창녕을 찾는다.

크고 잘생긴 창녕지석묘를 만져보고 살펴보는 학생들.

창녕은 가야의 옛 땅이다. 빛벌(비사벌)이라 한다. 가야의 뿌리를 일러주는 대표 문화유적은 창녕지석묘다. 나지막한 야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청동기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인돌보다 10배는 크다. 가로, 세로, 높이가 대략 5m, 3m, 3m씩이다. 부피는 30㎥를 훌쩍 넘고 무게는 100t 안팎이다.

창녕지석묘는 재질이 화강암이다. 낙동강과 가까운 때문인지 주변에는 푸석푸석한 진흙바위 퇴적암뿐이다. 화강암은 10리(4km) 바깥에나 있다. 멀리서 크고 무거운 바위를 갖고 오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무덤 주인공의 권력이 강대했다는 증거다. 창녕지석묘는 창녕 일대 빛벌가야의 원형이다.

망우정 뒤편 언덕배기에 있는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를 둘러싸고 얘기를 나누는 학생들.

대웅전은 고풍스런 단청도 멋지고 병풍바위 배경도 멋지다. 앞으로는 단정하면서 웅장한 삼존불, 뒤로는 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를 품고 있다. 맞은편 원음각은 옛적 통로 구실을 했음직하고 돌부처 모신 약사전은 지붕이 몸통보다 두 배 큰데 앞뜰에는 조그만 고려시대 삼층석탑을 두었다. 산령각과 칠성각이 모두 있는 것도 독특하다. 산신과 칠성신은 토속신이다. 산령각·칠성각은 외래종교 불교가 전통 종교를 껴안은 흔적이다. 구시(구유)도 있다. 크고 기다란 통나무 속을 파내었다. 옛날 법회를 할 때 주먹밥을 연잎에 싸서 담아 놓던 통으로 1000명 분량이 들어갈 정도다. 범종각에서는 법고를 받치는 짐승이 눈길을 끈다. 사자 비슷한데 위에서 보면 화가 나 있지만 앞에서 눈높이를 맞추면 웃고 있다. 내려오면서는 옛적 오솔길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영감·할멈 돌장승 한 쌍도 눈에 담을 만하다.

사람들은 신라진흥왕척경비를 창녕 대표 유물로 내세운다. 만옥정공원 높은 데 있다. 진흥왕은 빛벌가야를 정복하고 555년 하주(下州)를 설치했다. 561년 군사 퍼레이드를 크게 벌이고 내용을 척경비에 새겼다. 낙동강 유역 가야 잔존 세력을 향한 정벌의 나팔소리다. 마지막 남은 대가야는 이듬해 멸망시킨다. 창녕군은 '진흥왕 행차길'을 내어 놓고 있다. 피지배민 가야보다는 정복자 신라에 더 끌리는 모양이다.

양덕중 학생들이 술정리동삼층석탑에서 특징을 하나씩 찾아보고 있는 학생들.

선정비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을 위하여 세웠다. 척경비와 같이 만옥정공원에 있다. 선정(善政)비 말고 잊지(忘) 못하(不)는 불망비, 공덕(德)을 칭송(頌)하는 송덕비, 눈물(淚)이 흐를(墮) 정도라는 타루비도 있다. 학교를 세우고 키운 수령을 기리는 흥학비도 있다. 아이들은 빗돌 사이를 오가며 머릿돌의 용과 받침돌의 거북을 두고 "허리띠 같다" "심술궂게 생겼다" 등 조선 석공들의 작품을 평했다.

석빙고는 우리나라에 6개가 남았는데 모두 영남이다. 청도·현풍·경주·안동에 하나씩 있고 창녕에는 창녕읍과 영산면에 하나씩 있다. 창녕석빙고는 덩치도 크고 모양도 온전하다. 멀리서 보면 고분 같지만 고분은 평평한 데 있고 석빙고는 비스듬한 데 있다. 얼음 녹은 물이 잘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뒤편으로는 반드시 개울을 끼고 있다.

돌을 쌓고 흙으로 덮는 노동은 상민과 종놈의 몫이었다. 겨울철 강에서 얼음을 깨고 나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철 얼음으로 더위를 식히며 맛난 음식을 즐기는 것은 양반 차지였다. 우리 조상은 어느 쪽이었을까? 누리는 양반이었을까, 개고생하는 상민·종놈이었을까. 시원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석빙고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성싶다.

아이들은 앞서 관룡사 약사전 앞 석탑과 만옥정공원 퇴천삼층석탑을 눈에 담았다. 그 둘과 술정리동삼층석탑을 견주면 특징이 드러난다. 눈밝은 몇몇 친구가 알아보았다. 부분을 이루는 돌은 물론 전체 덩치까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다듬고 쪼은 조각도 섬세하다. 2·3층 몸돌은 네모반듯한 반면 그 아래 1층 몸돌은 길쭉하여 날렵한 상승감이 살아 있다. 창녕의 신라 유물 가운데 역사성은 척경비가 으뜸이고 아름다움은 동탑이 으뜸이다.

망우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말년을 보낸 장소다. 곽재우는 본가도 부자였고 외가·처가도 부자였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는 데 재산을 다 바쳤다. 마지막 남은 망우정마저 자기 소유로 하지 않았다. 포산 곽씨 직계 후손이 아니라 외손사위 벽진 이씨 도순한테 물려주었다.

"자네(이도순)한테 산수를 좋아하는 어진(賢) 마음이 있기에 정자를 사사로이 여기지 않고 준다네(與)." 망우정 현판 옆에 여현정 현판이 하나 더 달려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어, 정자가 아닌데요" 한다. 멋진 친구다. 정자는 방을 두지 않고 바닥에 마루를 깐다. 망우정은 방도 두 개 있고 아궁이도 있다. 자연과 노니는 정자가 아니라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랑채 모양새다. 그래도 망우정에서 보는 낙동강은 마냥 멋지다.

오후 3시 넘어 해가 살짝 기울면서 강물이 황금빛으로 출렁였다. 뒤편 언덕배기 1789년에 세운 유허비에서도 그럴듯한 낙동강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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