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산 : 동서남북 치우침 없이 바다 품고 사람 안았네
의령의 산 : 의병·부자 키운 중중첩첩 의령 산 봉우리

동서남북 치우침 없이 바다 품고 사람 안았네

거제의 산

경남에서 가장 큰 섬인 거제는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심장이다. 오대양(五大洋)을 누비는 수많은 배의 고향이기도 하다. 거제를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배에 비유하는 이유다. 거제의 진산인 계룡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산세는 완벽하리만큼 조화와 균형미를 갖추었다. 어느 한쪽 치우침이 없이 바다를 품고 사람을 품은 거제의 산은 따스하다. 충남 공주의 계룡산처럼 거제의 계룡산은 전란(戰亂)을 피해 이곳으로 찾아든 많은 이의 목숨을 지켜주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말한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 바로 계룡산이다.

거제의 산은 어디를 올라도 경관이 뛰어나다. 계룡산에 오르면 부산, 통영, 고성, 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의 잔잔한 은빛 물결은 덤이다. 계룡산을 거쳐 선자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권한다.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5시간 남짓 산행은 눈이 호강한다. 거제 남단으로 내려가면 노자산과 가라산으로 이어지는 바다 산행도 압권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시다. 고개를 들어 시야를 넓히면 남쪽 망망대해가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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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대금산은 창원 천주산과 무학산, 사천 와룡산, 창녕 화왕산 등과 함께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산이다. 대금산 정상 아래 활짝 핀 진달래가 장관이다. / 유은상 기자

'거제 신화'의 상징인 대우조선해양을 품은 옥녀봉~국사봉 구간을 5시간 남짓 걷는 동안 거제의 아름다운 포구와 대우조선의 위용을 감상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진달래가 불타는 '봄 산행 1번지'로 불리는 대금산도 빼놓을 수 없는 구간이다. 임도가 있어 산행이 다소 밋밋하지만 대신 진달래가 피는 계절엔 황홀경 그 자체다. 대금산 단독 산행에 아쉬움이 있다면 연초에서 옥포로 넘어가는 봉산재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권한다. 대금산을 거쳐 대금마을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4시간 산행으로 적합하다.

태백·소백산맥 정기 받은 이곳, 수많은 삶 기대 살았다오

거제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섬이라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들판이 넓다. 기후가 따뜻하고 물도 풍부해, 일찍부터 사람이 깃들어 살았다. 거제의 옛 이름은 상군(裳郡)이다. 신라 문무왕 17년(677년)부터 이렇게 불렀다. 치마 상(裳)자를 쓴다. 신라 이전 삼한시대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불렸는데, 두루기(도롱이)에서 유래한 말로 역시 치마와 비슷한 뜻이다. 이런 지명은 산세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치마폭을 사린 모습에서 붙여진 것이다. 여인은 거제 중심에 우뚝 솟은 계룡산(鷄龍山·566m)이고, 치마폭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산맥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동쪽에는 옥녀봉(玉女峰), 서쪽에는 산방산(山芳山), 남쪽에는 가라산(加羅山)과 노자산(老子山), 북쪽에는 대금산(大錦山·438m)이 큰 산을 형성하고 있다. 중앙과 동서남북에 중심 산을 갖췄으니 그야말로 음양오행을 실현한 산세다.

꽃봉오리 계룡산

육지에서 거제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크게 두 개다. 먼저 지리산에서 뻗은 소백산맥의 줄기가 고성 벽방산과 통영 제석봉을 지나 통영과 거제 사이 바다, 견내량(見乃梁)을 건너 거제로 들어선다. 시래산(始來山·264m)이 그 첫 봉우리인데, 이름 그대로 육지로부터 처음 이어진 산이란 뜻이다. 다른 한 줄기는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줄기 중 하나가 창원시 진해구 천자봉에서 지금 거가대교가 지나는 가덕도, 저도, 이수도를 통해 바다를 건너 대금산을 이뤘다. 이 두 줄기가 거제를 휘돌아 가운데 피워낸 꽃이 계룡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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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통신대봉에서 바라본 거제면 전경. 바다와 들판이 어우러진 풍경이 시원하다. /유은상 기자

계룡산은 거제의 진산(鎭山·조선시대 국가가 지정한 그 고을을 수호하는 산)이다. 산 정상은 닭 머리를 닮았고, 산 끝자락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닭 계(鷄), 용 용(龍)자를 썼다. 계룡산 동북 방향은 거제시청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있는 고현(古縣)이다. 한자를 보면 옛 고을이란 뜻인데, 조선 숙종(1661~1720) 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이 고을의 읍치(邑治·관아가 있던 고을의 중심지)였다. 이후 계룡산을 넘어 남서 방향, 거제면 동상리로 옮겨진다. 지금도 동상리에는 객사(치성관)와 질청 등 옛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계룡산 정상에서 북동 방향 고현지역 도심과 조선소, 남서 방향 거제면 너른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거제 계룡산은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말한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으로 알려졌다. 나라에 난리가 나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다. 실제 한국전쟁 때 거제 주민 10만, 피난민 20만, 포로 17만이 계룡산 자락에서 목숨을 유지했는데, 정감록이 기록한 '계룡산하구백만'(鷄龍山下求百萬·계룡산에서 백만이 구제된다)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정상 아래쪽에는 절터가 하나 있는데, 신라시대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연 의상대사가 수도한 곳이라 해서 의상대(義湘臺)라 불린다. 정상에서 산 능선을 따라 여시바위가 있는 봉우리 아래에 이르면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를 감시하던 UN군 통신대 잔해가 있다. 대대적으로 가꿔진 거제시 고현동 포로수용소 유적공원과 비교해 쓸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전쟁 흔적을 있는 그대로 간직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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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에서 바라본 삼성중공업. / 유은상 기자

용 꼬리와 돼지 산

옛사람들은 거제면에서 고현으로 가려고 계룡산을 넘었다. 그 고개가 고산재다. 고자산재라고도 불린다. 이름 유래와 관련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어떤 할머니가 친정 가는 길에 이 고개를 오르는데 효성 지극한 아들이 손을 잡고 올랐다 해서 고자산(姑子山·어머니와 아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옛날, 이 고개를 넘는 남매가 있었는데, 갑자기 비를 만났다고 한다. 비에 젖은 누나의 몸을 보고 동생이 욕정이 생기자 괴로워하며 자신의 성기를 자르고 고자가 되었다 해서 고자산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다.

고산재를 경계로 남쪽이 선자산(扇子山·519m)이다. 산 전체가 부채 모양이라 한자 부채 선(扇)을 썼다. 계룡산과 바로 이어져 있어 산세를 구분하기 어렵다. 산 남쪽 자락에 거제에서 가장 큰 구천저수지가 있다. 앞서 계룡산 끝 자락이 용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용은 꼬리가 아홉 개 있는데, 계곡을 향해 뿌리를 박으며 구천계곡을 형성했다. 이를 구룡호(九龍湖)라 불렀는데, 구천저수지가 바로 그 후손인 셈이다.

계룡산에서 거제시청 방향 도심 건너로 보이는 산이 독봉산(獨峰山·335m)이다. 돼지처럼 생겼다 해서 저산(猪山)이라고도 불렸다. 오랜 옛날 고현 바다에서 섬 하나가 둥둥 떠와 고현 들판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자 그 자리에 눌러 앉아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2009년 '독봉산웰빙공원'이 생기며 시민 휴식처가 됐다.

옥녀봉서 산방산까지

거제 섬 동쪽에는 옥녀봉(玉女峰·555m)이 가장 높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이 산 약수터에서 목욕을 하고 사슴과 놀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실 옥녀봉은 아주 흔한 이름이다. 거제에도 같은 이름이 4곳이나 있다. 하지만 거제시 일운면과 아주동 사이에 있는 옥녀봉은 거제의 동악(東岳)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옛 지도에서는 옥산망(玉山望)이나 옥림산(玉林山)으로 표시됐다. 산 정상에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가 훤히 보인다. 옥녀봉과 이어지며 조선소를 둘러싼 산이 국사봉(國士峰·465m)이다. 나란히 솟은 봉우리 두 개가 있는데, 그 모습이 신하가 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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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통신대. / 유은상 기자

거제 서쪽을 대표하는 산은 둔덕면에 있는 산방산(山芳山·507m)이다. 산 정상에 솟은 바위 봉우리 세 개 모양이 한자 뫼 산(山)자를 닮아 산방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붓 통에 붓이 꽂혀 있는 모습이라고 해 필봉(筆峰), 봉우리가 세 개라 삼봉산(三峰山)이라고도 한다. 현지 주민 중에는 더러 사람 옆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바위 모양 자체가 수려해 거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명산이다. 산방산에서 서쪽 바다 방향으로 건너편에 있는 산이 우두봉이다. 이곳에 둔덕기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거제를 기성현(岐城縣)이라 했는데, 읍치가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거제 풍경을 이르는 기성팔경(岐城八景)에서 거제를 달리 부르는 기성이란 명칭이 여기로부터 비롯된 듯하다. 서쪽에서도 북쪽 끝머리에 망치산(望峙山·362m)이 있다. 창원, 통영, 부산까지 시야가 트인 곳이다. 망치산 아래 사등성이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 거제 읍치가 있던 곳이다.

최고봉의 최고 전망

거제 섬의 남쪽은 노자산과 가라산 연봉이 중심을 이룬다. 노자산(老子山·557m)은 계룡산에서 이어진 줄기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으로 예로부터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산이었나 보다. 이 산에 불로초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래서 늙을 노(老) 자를 써 노자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은 무지개색 깃털을 지닌 팔색조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동백숲과 팔색조 서식지는 천연기념물 233호로 지정돼 있다. 노자산에는 자작나무와 박달나무도 많이 자란다. 고려시대 이곳 나무를 강화도로 실어가 팔만대장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노자산 능선은 남쪽으로 뻗어 가라산(加羅山·586m)으로 이어진다. 거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산 아래서 보면 두 산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붙어 있다. 남쪽 끝 가장 높은 산인 만큼 바다 전망이 뛰어나다. 특히 남해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일출과 낙조를 모두 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거제 섬의 남쪽 끝은 망산(望山·375m)이다. 거제에도 망산이 여러 곳 있지만 이곳 전망이 가장 좋다고 한다. 정상에 발달한 기암괴석이 볼 만한데 이를 홍포만물상(虹浦萬物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망산이 홍포마을 뒤에 있어서다.

진분홍 산길·봄바다 조화로운 이 땅, 그대 잠시 쉬어가오

자연의 조화가 신비롭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추위와 싸우며 올랐던 산에 하나둘 초록이 움트더니 이제는 꽃이 온통 뒤덮어 버렸다.

매화, 산수유, 벚꽃, 유채와 함께 봄의 전령으로 상징되는 꽃이 진달래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생명력 또한 강하기 때문이다. 해방을 꿈꾸던 일제 강점기에는 '선구자'로 상징되기도 했고 비바람과 때늦은 봄눈에 떨어진 꽃잎은 선구자의 수난으로 표현됐다.

'퇴색한 민주주의, 후퇴한 역사'를 바로잡고자 지난해 추운 겨울을 견뎌낸 오늘날 우리에게도 봄의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올해 진달래는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경남에서 진달래로 유명한 산은 창원 천주산과 무학산, 사천 와룡산, 창녕 화왕산, 거제 대금산 등이 꼽힌다. 그중에서도 대금산은 가장 빨리 꽃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바다와 어우러진 풍경을 가지고 있어 더 이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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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금산 진달래 터널. / 유은상 기자

비단을 두른 산

대금산(大錦山·438m)은 거제 장목면과 연초면에 걸쳐 있다. 거제에는 5대 주산이 오행에 맞춰 놓은 듯 동서남북과 중앙에 있는데 대금산은 북쪽을 대표하는 거제의 북악(北岳)으로 일컫는다.

오르는 길이 수월하고 해발고도가 438m밖에 되지 않아 낮게 느껴지지만 정상에 서면 다르다. 중봉과 시루봉이 발아래 있고 바로 옆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 우뚝 솟아 드높아 보인다.

대금산은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쇠를 생산한 곳이라 하여 대금(大金)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대금(大錦)으로 바꿔 불렀다. 산세가 온화하고 정상 주변에 봄에는 진달래가, 여름에는 낮은 초목이 비단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름 변천에 얽힌 설화도 전해진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유명한 풍수가 이곳을 지나면서 쇠 금(金) 자를 비단 금(錦)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쇠 금을 사용하면 쇠의 성격처럼 강하고 거친 인재가 나지만 비단 금을 사용하면 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날 것이라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대금산 자락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태어났고, 이 밖에도 대통령 비서실장,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가 많이 배출됐다고 설화와 연결해 이야기한다.

대금산 정상 아래 중봉 또는 중금산으로 불리는 봉우리에는 조선 말기에 쌓은 중금산성이 있다. 산성은 대금, 율천, 시방 등 인근 3개 마을 주민이 왜구 침입에 대비하고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과 약수터가 있다.

배려심 깊은 꽃

진달래 군락은 대금산 7∼8분 능선에 있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보면 '비단을 두른 산'으로 바꾼 연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환상적인 풍경은 착시현상으로 이어진다. 진분홍 진달래 물결은 붉은 마그마로 변해 산 아래로 천천히 타고 내린다.

대금산 진달래는 3∼5m 높이로 자라 있어 산 정상에 오르려면 꽃 터널을 지나야 한다. 이 또한 도열한 호위병의 열병식을 받는 듯 색다른 경험이다. 가까이서 본 진달래는 오롯이 분홍색이 아니라 보라색도 약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진달래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매화, 산수유, 벚꽃, 유채꽃 등은 흔하게 접하지만 진달래를 보는 일은 예전처럼 쉽지 않다. 도심에서 다소 벗어나거나 산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다른 꽃은 정원수나 가로수로 인기를 얻으며 확산했지만 진달래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달래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여리고 배려심이 깊다. 혼자 지내기보다 군락을 이루며 자신보다 키가 큰 나무들이 들어서면 어느샌가 자리를 내주고 홀연히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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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꽃, / 유은상 기자

정확히 말하면 진달래가 흔했던 것은 근대화 과정에 산이 황폐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림녹화가 성공하면서 진달래는 다른 초목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대금산 진달래 군락도 점차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1997년 진달래 축제를 시작할 때 10만 4000㎡에 가까웠던 면적은 이제 10만㎡ 정도라고 한다. 특히 대금산 진달래는 산림녹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훼손에 의한 것이라 더 안타깝다.

수많은 사람이 산을 누비면서 진달래 군락은 듬성듬성해졌고 등산로는 차량이 다녀도 될 정도로 넓고 반들반들해졌다. 물론 휴식년제도 시행하고 훼손이 심한 곳에는 다시 나무를 심었지만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더 오래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려면 등산객의 각성이 절실하다.

바다 경치도 일품

'2017 대금산 진달래 축제'는 지난 주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굳이 진달래 철이 아니어도 대금산을 찾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다른 진달래 명승지와 달리 대금산은 바다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고 접근성 또한 뛰어나다.

정상에 서면 한려수도의 아기자기한 해안선이 발아래 와 닿는다. 흥남해수욕장으로 쉼 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에메랄드 물결은 작은 파도 소리로 전해지는 듯하다.

시선을 더 멀리 옮기면 분홍색 진달래와 대조를 이룬 망망대해의 푸른빛이 찌든 눈을 씻어 낸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면 멀리 거가대교가 미니어처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그 왼쪽으로 진해와 마산이, 오른쪽으로 가덕도와 부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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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대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와 거가대교, 겹겹치 층을 이룬 옥녀봉과 국사봉, 계룡산, 산방산, 산그리메. / 유은상 기자

반대 방향을 향하면 이번에는 겹겹이 층을 이룬 옥녀봉과 국사봉, 계룡산, 산방산 산그리메가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늦가을이면 시루봉에 출렁이는 억새 물결도 일품이다. 대금산 등산로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다. 반깨(율천)고개, 절골마을, 명상마을, 상포마을, 정골마을을 기점으로 오르는 길이다. 반깨고개에서 오르는 길이 1.6㎞로 1시간이면 정상에 닿는다. 다른 코스도 쉬엄쉬엄 2시간이면 가능하다.

특히 거가대교가 뚫리면서 대금산은 더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창원, 김해, 부산 등에서 오려면 통영 쪽으로 둘러야 해 만만찮은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경남, 부산 어디서 오든 하루면 충분하다.

의병·부자 키운 중중첩첩 의령 산 봉우리

의령의 산 

경남의 중앙부에 위치한 의령은 '충의의 고장'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으로 상징되는 의령 의병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나 왜적과 맞섰다. 의령인의 자랑인 '의병정신'은 산세(山勢)와 무관하지 않다.

서북부에 우뚝 솟은 자굴산과 동북부의 국사봉은 의령을 대표하는 산이다. 자굴산은 한우산과 산성산, 선암산, 응봉산 등을 거느리고 있다. 칠곡면 내조마을~금지샘~자굴산~한우산~선암산~벽계 일붕사로 이어지는 6시간 남짓한 코스는 자굴산과 한우산의 장쾌한 능선을 걸으며 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조망할 수 있다. 봉수면 서암리에서 출발해 국사봉~천왕산~미타산~불관사를 거치는 코스는 합천군 대양면과 적중면, 초계면 너른 들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겨울 산행의 묘미가 남다른 구간이다. 산행은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밖에 대암산, 만지산, 벽화산도 나름 숨은 매력이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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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우산은 낮에 만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저녁노을과 별이 쏟아지는 야경도 일품이다. 멀리 왼쪽에 솟은 지리산 천왕봉과 오른편 황매산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유은상 기자

한우산과 자굴산에서 시작된 기운이 수많은 지맥을 따라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세 덕분에 의령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자랑이 '부자(富者)'다. 일제강점기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모은 막대한 재산을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조달한 백산 안희제 선생,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세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삼영화학그룹 관정 이종환 회장, 대한민국 재벌의 상징인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에도 산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남강과 낙동강을 끼고 우뚝 선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의령 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의령 진산 '덕산' 그리고 또 다른 의령 산 이야기

산 넘어 산, 그 너머에도 산이다. 의령 자굴산(897m) 정상. 어느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도 산등성이와 봉우리가 겹을 이뤘다. 의령은 산지 비율이 높다. 2015년 기준 전체 70%를 차지한다. 비율만 보면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둘러싸인 함양과 견줄 만하다.

의령 산세는 크게 두 개 산군(山群)으로 나뉜다. 우선 한우산(836m)과 자굴산에서 시작하는 산군은 의령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주로 동남쪽으로 수많은 지맥을 뿌리며 남강과 낙동강변에 이른다. 기운이 상당해 호암 이병철 등 이름난 인물 여럿이 이 지맥 아래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이어 국사봉(國士峰·669m), 미타산(彌陀山·662m) 줄기를 중심으로 한 산군은 의령 북쪽 산들을 거느리며 합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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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의령 진산인 덕산(봉무산). 가운데 하얀 탑이 보이는 봉우리가 '왕뒤'다. /유은상 기자

봉무산 왕뒤 이야기

조선시대 의령 지도는 대부분 한우산·자굴산 산군을 중심으로 그렸다. 궁류면에 있는 만지산(606m) 주변을 합천과 경계 지역으로 표시했다. 만지산은 신반천을 경계로 봉수면 국사봉과 마주한 산이다. 만지산에서 자굴산, 벽계산(碧溪山) 줄기가 이어진다. 이들 지맥은 크게 자굴산 줄기로 보면 된다. 벽계산이 오늘날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벽계관광지가 들어선 벽계리와 관련이 있지 싶다. 이 벽계산 줄기에서 이어진 것이 덕산(德山)인데, 조선시대 의령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이다.

덕산은 현재 의령군청 뒤편 호국공원이 있는 낮은 등성이, 봉무산(鳳舞山)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덕산을 신덕산(神德山)과 그 아래 봉덕산(鳳德山)으로 나눠서 그렸는데, 봉덕산이 지금 봉무산이 된 듯하다. 이 주변 산세가 봉황새가 알을 낳고 앉아 있는 모양새라 봉황새 봉(鳳)자를 썼다.

봉무산은 '왕뒤(왕띠)'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는 왕의 마누라(왕비)라는 뜻이라고 한다. 실제 조선 24대 왕 헌종(재위 1834∼1849)의 비 효현왕후 김씨가 어릴 적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효현왕후는 순조 33년(1833년)에서 헌종 1년(1835년)까지 2년간 의령 현감을 지낸 김조근의 딸이다. 당시 현감의 사택이 봉무산 근처에 있었는데, 이후 딸이 왕비가 되어 사람들이 왕뒤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주민들은 왕뒤보다는 '왕띠', 이렇게 조금 센 발음으로 부른다.

지난 2013년 의령군은 봉무산 정상에 호국공원을 조성했다. 나무가 울창해 전망은 별로고, 그냥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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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우리가 겹을 이룬 의령 산세를 잘 묘사한 <1872년 지방지도>. /의령군지

남산 대나무숲 이야기

의령읍 남강변에 우뚝 선 충익사 의병탑은 의령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 의병탑 뒤로 든든하게 서 있는 산이 남산(321m)이다. 둘레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옛 이름은 구룡산(九龍山) 혹은 거북 구(龜) 자를 써 구룡산(龜龍山)이라고 했다. 지금도 남산 동쪽 기슭에 구룡마을과 그 앞 구룡농공단지, 구룡사거리에 이 이름이 남아 있다. 의병교에서 바라보면 의병탑 왼쪽 위 남산 중턱에 둥그렇게 주변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제법 넓은 대숲이다. 예사로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신경 써서 보면 제법 두드러진다. 대숲은 조선시대 황덕유라는 의령현감과 관련이 있다. 이분은 학식이 꽤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다. 인조 18년(1640년) 황 현감이 당시 관아 뒤 고을 진산인 봉무산(당시에는 봉덕산이었겠다)과 마주 본 남산(구룡산)에 대나무를 심게 했다. 대나무는 봉황이 좋아하는 먹이다. 더러 의령 성씨 중 세력이 강했던 진주 강씨의 기를 꺾으려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봉황 먹이설이 설득력 있다. 산 이름에 봉황새 봉(鳳)자가 들어간 곳 주변에 이렇게 대나무를 심은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 심은 대나무가 점점 영역을 넓혀 지금은 산 중턱에 떡 하니 존재감 있게 자리 잡았다.

사실 황덕유 현감은 대나무를 심은 일보다 치수를 훌륭하게 한 것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는 게 의령군 민회관 입구 느티나무 아래 있었던 소황제(紹黃堤) 비석이다. 도로를 확장하면서 지금은 의령읍에서 정암교 가는 길 백야오거리 앞 88동산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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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 산 중턱에 둥그렇게 대숲이 있다. 이 대나무는 조선시대 황덕유 현감이 심었다. /유은상 기자

이 비석은 일종의 제방준공기념비다. 소(紹)는 앞의 일을 잇는다는 뜻이고, 황(黃)은 황덕유 현감이다. 그러니까 황덕유 현감의 뜻을 잇는다는 말이다. 1901년 당시 정봉수 군수가 지은 것이다. 비문은 대강 이렇다. 황덕유 현감이 옛날 의령읍을 지키려고 제방을 쌓았는데, 광무 5년(1901년)에 폭우로 무너진 것을 정봉시 군수가 복구하며 황 현감의 뜻을 이었다. 의령문화원 향토사문화연구소 신경환(64) 소장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황 현감이 제방을 쌓기 전 의령 읍치는 자주 물난리를 겪었다고 했다. 큰 홍수가 든 어느 해 보다 못한 황 현감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재민을 먹여 살릴 양식과 제방 구축 비용을 얻었고, 주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쌓았다는 내용이다.

봉황대와 김춘추 이야기

한우산·자굴산 산군의 북쪽 끝자락 중 하나가 봉황대(鳳凰臺)다. 궁류면 평촌리 지방도를 지나다 보면 보인다. 깎아지른 암석 절벽이 기가 막힌 곳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사찰 일붕사는 기네스북에 오른 동굴법당으로 유명하다. 신라 성덕여왕 26년(727년) 혜초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오는 중 꿈에서 지장보살이 점지해 준 기암절벽을 찾았는데, 봉황대가 가장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덕사란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이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한다. 봉황대는 암벽이 봉황의 부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곳이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왕자일 때 사용한 첫 군사 요새라는 것이다. 그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기틀을 쌓은 이다. 기록에는 태종왕자 3인이 이곳에 군대를 주둔했다고 돼 있다. 당시 신라 최고 부대였는데, 그 이름이 봉황대였다고 한다. 부대 이름이 그대로 산 이름이 된 것이다.

미타산과 국사봉 이야기

봉수면 신현리 국사봉(669m)에서 시작해 천황산(657m), 미타산(663m)으로 이어지는 등성이 길은 등산객들이 제법 찾는 종주 산행코스다.

국사봉은 봉수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 정상 바위 숲이 장관이다. 신반천을 사이에 두고 만지산(萬芝山·606m)과 마주 보고 있다. 비슷한 높이와 모양새여서 그런지 두 산 사이에 힘겨루기 전설이 전해진다. 국사봉 장수와 만지산 장수가 큰 바위를 상대방 쪽으로 던지며 힘자랑을 했다. 그러다가 바위 하나가 두 산 사이에 있는 서암 마을에 떨어졌다. 마을 사람이 다칠 뻔했기에 두 장수는 힘겨루기를 그만뒀다. 이 바위는 현재 서암 마을회관 곁에 있다. 또 만지산 장수가 국사봉 장사에게 던진 바위는 그대로 산꼭대기에 세워져 까막새미라 불리는 바위 숲이 됐다. 이 때문에 국사봉이 만지산보다 더 높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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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일붕사.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전설이 어린 봉황대 절벽 아래 있다. /유은상 기자

천황산과 미타산 산세는 사실 합천 초계들판에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인다. 미타산이란 이름은 산 모양이 민드름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불교식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미타'는 서방정토에서 불법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부처 아미타불이고, 옛날 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승려를 '국사'라고 하니 이 주변 산봉우리 이름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타산과 그 주변 산세가 영험하다는 해석이겠다. 이를 증명하듯 미타산에는 대문바위나 상사바위, 쿵쿵길, 항상 흙탕물이 나오는 우물 등 다양한 전설이 전한다.

남명 조식도 반한 산세… 초록 융단이 파노라마처럼

의령은 남강을 끼고 있다. 강변 비옥한 땅에서는 수박, 파프리카, 구아바, 참외 등의 특산물이 생산돼 토요애라는 브랜드로 판매되면서 명성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의령 하면 으레 강과 평야의 지역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나 의령은 높은 산은 적지만 생각보다 산이 많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자굴산(堀山·897m)과 한우산(寒雨山·836m)은 의령을 대표하는 산이라 하겠다. 외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꼭 가봐야 할 산으로 꼽힌다. 의령에 살거나 태어난 사람에게는 더 특별한 곳이다. 의령의 지붕이자 삶의 터전이라는 물리적인 배경을 넘어 의령인의 기상과 심성이 발원한 심리적인 근원으로 여기는 곳이다.

경남 명산 갤러리

자굴산은 의령읍 북서쪽 칠곡면과 가례면과 대의면에 걸쳐 있는 의령 최고봉이다. 자굴산을 꾸미는 말에는 진산, 주산, 명산, 영산 등 산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다 동원된다. 합천군 쪽에서 보면 병풍을 두른 듯 경사가 가파르지만 의령 쪽에서 보면 산세가 완만해 친근한 느낌이다. 이런 까닭에 산 아래서 보면 수식이 과장됐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하나 정상에서 호흡을 가다듬을 때쯤이면 성급한 판단이자 선입견임을 깨닫게 된다. 주변에 견줄 만한 높은 산이 없어 시원한 전망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말 그대로 반전 있는 산이다.

지리산 천왕봉, 황매산, 덕유산, 가야산, 비슬산, 화왕산, 영취산, 무학산, 광려산, 여항산, 방어산, 망운산, 금오산이 시계방향으로 360도 쫙 펼쳐진다. 도내 유명 산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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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굴산 표지석. / 유은상 기자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난 청년 남명 조식도 자굴산 전망에 반해 수시로 올라 지리산을 가슴에 품었다 한다. 금지샘 쪽에 있는 명경대는 선생이 전망을 감상했던 곳이다.

자굴산 이름 또한 뛰어난 조망과 연관돼 있다. 자굴산 지명은 '성문 위에 높게 설치된 망루 모양으로 우뚝 선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자굴산은 그동안 도굴산이나 사굴산으로도 불리면서 혼란을 줬다. 옥편이 원인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작은 옥편에서는 자()의 음을 '도'와 '사' 두 가지로만 풀이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의령문화원 향토사연구회는 이를 바로잡고자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또 이 계절에 자굴산을 오르게 되면 전망 외에도 곳곳에 핀 야생화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더 남쪽 더 낮은 곳에서는 이미 철 지나 버린 진달래 군락이 정상 바로 아래에서 산객을 반긴다. 보라색 얼레지, 노랑 민들레, 흰색 제비꽃도 각자 군락을 이루고 아름답게 피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계절의 주인공은 신록이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작은 잎들의 연두색 하모니가 눈을 싱그럽게 하고 호흡을 상쾌하게 만든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모든 구석구석 하나하나 씻어낸다.' 이양하 선생 수필 <신록예찬>의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신록은 자굴산이 아니라도 아름답지만 자굴산이어서 더 빛나 보였다.

찬비가 내리는 산

한우산은 궁류면 벽계리에 있는 산으로 자굴산에서 맥이 이어진다. 산세가 웅장하고 수풀이 울창하며 특히 계곡이 깊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도 차가운 비가 내린다고 하여 찰비산(찬비산)이라고 불렸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냉정산(冷井山)'으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나중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찰 한(寒)'과 '비 우(雨)'로 바뀌었다.

3㎞ 찰비계곡에는 소와 아기자기한 폭포가 많다. 이곳은 옛날 한 백정이 신분을 속이고 딸을 양반집에 시집 보냈다가 들통나 파혼당해 쫓겨오게 되자 화를 못 참고 딸과 가마를 물에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후 곳곳에 소가 생겨났는데 신부가 빠진 자리는 '각시소', 장롱과 가마가 빠진 곳은 '농소'와 '가매소'가 되었다고 한다.

계곡 아래에는 야영장 등을 갖춘 벽계관광지가 만들어지면서 여름철 더위를 식히려 계곡을 찾는 사람들 외에도 사시사철 관광객 발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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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굴산 명경대에서 바라본 풍경. 시원한 조 망 아래 칠곡면 방향으로 흘러내린 자굴산 자락의 신록이 눈부시다./유은상 기자

한우산 정상 주변에는 진달래와 철쭉 군락이 형성돼 있고 임도에는 벚나무와 개나리 가로수가 띠를 잊고 있다. 꽃들은 바통을 이어가며 산 정상에 봄을 물들인다. 매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는 철쭉제가 열리는데 올해는 오는 30일로 예정돼 있다. 가을이면 찰비계곡을 물들이는 단풍과 산 정상 억새 물결도 일품이다.

최근 한우산은 일몰과 야경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한우산의 밤은 다른 산의 낮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인 합천 방향으로 시야가 열려 있다. 그 널찍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 노을은 울림 또한 크다. 왼쪽 천왕봉에서 오른쪽 황매산으로 큰 선이 연결되고 그 앞뒤로 늘어선 산그리메가 계단을 이루며 깊이를 더한다.

해가 지고 나면 그 공간은 온통 별빛이 메운다. 인공조명으로 가득한 도심과 멀어 이곳의 별은 더 선명하다. 백패킹 야영지, 야경과 별 사진 촬영지로도 꽤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산 아래 가례면 방향에서 궁류면으로 도로가 잘 연결돼 있어 산길 드라이브와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려는 이들도 많이 찾는다.

"한우산 생태 숲서 생생한 체험 즐겨요"

한우산의 또 다른 볼거리 '한우산 생태 숲'이 지난 15일 개장했다.

한우산 생태 숲은 산림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고 생태 교육 체험을 위해 조성됐다. 한우산은 뛰어난 자연환경과 식생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2008년 생태 숲으로 지정됐다. 이후 2016년까지 50억 원의 예산을 들여 100㏊ 면적의 생태 숲이 조성됐다.

생태 숲은 100% 친환경(태양광 발전)으로 운영되는 생태 숲 홍보관과 한우산 생태탐방 명소인 10리 숲길, 산철쭉과 도깨비 설화 테마 공간인 철 쭉설화원, 특허청 상표등록 소나무 자생지인 홍의송원 등 다양한 생태탐방 공간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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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우산 철쭉설화원 대형 도깨비 조각이 재치있다. /유은상 기자

또 군은 자생 수목의 보전 확대를 위해 산철쭉 21만 그루를 심어 전국 최대 산철쭉 군락지로 만들었다.

특히 도깨비 설화 테마 공간인 철쭉 설화원은 꼬마 산객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철쭉설화원은 정상 아래 한우정 정자에서 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대형 문지기 도깨비상에서 시작된다. 그 아래로 난 나무 계단 옆으로는 철쭉 군락이 빼곡하다. 공원은 한우도령과 응봉낭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 진행에 따라 꾸며져 있다. 응봉낭자와 한우도령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도깨비 쇠목이가 응봉낭자에 반해 두 사람의 사랑 사이에 끼어들면서 슬픈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 진행에 따라 전시된 도깨비 쇠목이의 대형 조각이 앙증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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