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공자·예수 가르침 밴 인류 문화
글로벌시대 행복·평화 종교가 답해야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00여 년이 지난 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한 많은 비구 스님이 생전의 가르침을 탐구하기에 열중했다. 완고하리만큼 계행을 지켰다. 또 부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한 말씀도 그 뜻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교학 중심의 아비달마 부파불교가 그 흔적이다. 그러는 사이 일반 신도 대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수 비구 스님들의 틀에 갇혀 전유물이 되었다. 어려운 계행을 지키는 스님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수행에 자족했다. 농사짓고 물건 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스님들의 가르침이 너무 높고 어려웠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스님들의 권위는 높아만 갔다.

일상에 지친 재가 신자들은 점점 부처님의 따뜻했던 품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삶을 위로받기를 원했다. 일상의 삶 속에서도 자유롭게 속 깊은 부처님을 섬기기를 원했다. 이런 대중의 바람에 승단의 높은 비구 스님들의 반응이 없자 마침내 재가 신자들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의 대승불교다.

요즘 불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의 행태를 되짚어보면 곰곰이 생각되는 점들이 많다. 종교는 불변의 세계인가? 민중의 바람과 동떨어진 종교의 말로는 어디인가? 시대정신을 외면한 종교의 끝은 어디인가? 율법과 형식에 얽매여 민중의 간절한 바람과 아픔을 함께하지 못할 때 새로운 불교, 혹은 새로운 종교의 등장은 가능한가?

물론 종교사에 보면 이런 논리를 빙자해 민중을 기만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한 수많은 유사종교 사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옛적의 율법 전통을 고집하고 묵은 경전의 해석과 재해석을 거듭하면서 자기 울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런 경향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유사하다. 예수는 당시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율법처럼 지키면서 민중을 기만하고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던 당시 제사장들의 세력에 저항했다. 그는 결국 십자가의 형틀에 묶여 산화했지만 민중의 가슴에 새로운 메시아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사랑으로 변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물론 예수가 무조건 전통을 배격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왔다'는 그의 신앙고백이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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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공자 몰후 2500년, 예수 가신 지 2000년 세월을 지내오면서 인류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분들의 가르침이 녹아있다. 오늘날 세상 문명과 인류 진화는 그 결과다.

다만, 과학과 물질문명의 현기증 나는 발달과 세계가 하나로 교통 되고 인류 삶의 터전이 한데로 어우러지는 즈음에 어떻게 인류가 행복할 수 있고 다 같이 평화세계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종교가 답할 차례다. 종교의 미래와 운명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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