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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으니 남명의 가르침 들리는 듯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2) 합천
창원여고·합천원경고 학생들, 뇌룡정·영암사지 등 찾아
조선시대 선비 정신 느끼고, 문화재 가치와 의미 되새겨

2017년 06월 16일(금)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경남도민일보>가 경상남도교육청 지원으로 진행하는 '청소년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에서 창원여자고교(5월 9일)와 합천 원경고교(6월 1일)가 합천을 찾았다. 남명 조식 선생의 용암서원·뇌룡정과 망했지만 씩씩한 절터 영암사지,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는 해인사, 대가야 마지막 태자가 노닐었다는 월광사지를 둘러보았다.

◇용암서원·뇌룡정

용암서원은 남명 조식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려고 지었다. 뇌룡정은 남명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생전에 마련한 강학 공간이다. 용암서원·뇌룡정은 남명 조식의 외가 마을 삼가면 외토리에 있다. 남명 조식은 1000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퇴계 이황과 동시대 인물이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퇴계가 이치와 질서를 중시했다면 남명은 의리와 실천을 중시했다. 퇴계의 제자들은 이치와 질서를 따져 벼슬에 많이 나간 반면 남명의 제자들은 의리와 실천에 충실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많이 나섰다. 수제자 정인홍은 합천·삼가·초계·고령을 아우르는 의병장이었고 애제자 곽재우는 의령·영산·창녕·현풍을 아우르는 의병장이었다. 이 밖에도 남명 제자 출신 의병장은 많아서 경상도 의병장의 절반이었다 한다. 이렇게 스승이 남긴 뜻을 온몸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자가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제자들 가운데 곽재우는 벼슬에 나가지 않으려 애썼고 정인홍은 적극 진출했으나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뇌룡정에서 합천 원경고 학생들과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내용으로 용암서원 강당에 앉아 '도전! 골든벨' 문제를 풀면서 알아본 다음 바로 옆 뇌룡정으로 향했다. 뇌룡정에는 글귀 두 개가 걸려 있다.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과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이다. 연못처럼 조용히 있다 벼락처럼 소리를 내고 시체처럼 숨죽였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남명 조식의 가르침이 제대로 담긴 글귀다. 아무 때나 나서지 말라는 말이다. 자기를 내세우려고 깝죽대지 말고 평소에는 가만있다가 반드시 나서야 할 때만 나서라는 얘기다. 그래 남명 제자들은 평상시에는 자기 할 일 하며 조용히 지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자 몸을 아끼지 않고 떨쳐 일어났다.

◇영암사지

삼가장터는 1919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일제에 맞서 3만 명 넘게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역사가 있다. 삼가에서 제자들에게 실천이 중요하다 가르쳤던 남명 조식의 영향이 350년 세월을 넘어 이어졌다.(삼가에는 민비가 일본에 살해되자 일어난 을미의병에 가담한 용장도 많다.) 외토마을에서 영암사지로 가려면 삼가장터를 지나게 된다. 지금은 소고기로 이름난 여기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영암사지로 옮겨갔다.

황매산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가 자리 잡고 있다. 밝고 환하고 씩씩한 폐사지다. 빼어난 풍광에 더해 멋진 쌍사자석등·삼층석탑·(서)금당·돌계단·석축 등이 유명한데 아울러 살펴볼 것이 있다. 영암사지 유적들은 대부분 돌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깊은 산중에 이렇게 웅장한 절간이 들어설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정답은 배경으로 받쳐주는 모산재가 흙산이 아니고 돌산이라는 데 있다. 멀리서 가져오면 엄청 더 힘을 들여야 했을 텐데 바로 옆에 커다란 바위가 널려 있으니 이것이 영암사지가 여기 놓인 이유다. 우리는 앞에서 누군가 설명을 하고 다른 이들은 뒤따르며 듣는 그런 탐방에서 벗어났다. 아이들은 거북 모양 비석 받침(귀부)에서 쌍둥이 물고기 무늬를 찾고 석축에서 사자 얼굴을 찾아내는 등 팀별 미션을 능동적으로 수행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품은 해인사는 무척 그럴듯하다. 산세도 빼어나고 경관도 아름다우며 출입문이나 건축물들도 다들 조형미를 갖추었다. 해인사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대목을 골라 미션 내용을 구성했다. 느긋하게 산책하다시피 하는 친구도 있고 미션 수행을 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축도 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멋진 절간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누릴 수 있다면 그로써 만족이다.

문제를 풀어보고 미션 수행을 잘한 친구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안기고는 해인사의 또 다른 특징과 명물을 알아보았다. 합천과 가야산을 공유하는 고령은 1500년 전 후기 가야 맹주 대가야의 고장이다. 가야산 산신령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모시는 해인사 국사단은 대가야 건국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정견모주가 천신과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고령에 대가야를 세웠고 막내는 김해에 가락국을 세웠다. 외래종교인 불교 석가모니 부처가 절간을 지으려면 땅을 빌려야 했다. 가야산은 토속 신앙의 주인공 정견모주가 관장하고 있었다. 땅을 빌려준 데 대한 보답으로 석가모니가 마련해준 전각이 국사단이다.

해인사라면 옛날 문화재만 있는 줄 알지만 30~50년 세월이 지나면 더 대접받을 미래 문화재도 있다. 성철(1912~1993) 스님 사리탑이다. 1936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는데 해인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님이다. 해인총림 방장도 하고 조계종 종정도 하면서 동시대인들 정신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세상을 떠날 때 자기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유언했지만 가는 이는 가는 이 심정이 있고 남는 이는 남는 이 심정이 있는 모양이다. 남은 이들은 스님 말씀을 어기고 사리탑을 조성했다. 해인사 나온 다음 부도탑들 있는 데서 왼쪽으로 오르면 있다. 정사각형을 크고 작은 순서대로 세 겹 쌓은 다음 반구(半球)를 등이 닿게 겹쳤다. 그 위에 모나지 않고 동그랗게 원만(圓滿)을 올렸다. 가없이 확장하고 한량없이 수렴한다. 옛날 종 모양을 벗어나 현대 예술의 범주로 세련되게 들어선 사리탑이다.

◇월광사지 동·서삼층석탑

돌아오는 자락에 월광사지 동·서삼층석탑을 둘러본다. 월광사지는 신라에 멸망 당한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 노닐던 장소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을 여미었던 이들에 대한 느낌은 조금 아프고 쓸쓸하다. 여기 석탑은 대가야까지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통일신라 후기에 주저앉는다.

제법 너른 시냇물 둘이 만나는 자리에 풍경이 고즈넉하다. 잠깐 앉아 얘기 나누며 석탑에 대하여 알아보고 돌아서는데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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