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100개 넘어도 문헌 적어 연구 미진
임나일본부설의 반전 세밀한 고찰 필요

현재 함안군을 중심으로 창원 마산과 진주·의령 등 일부 지역이 영향권이었던 '아라가야'는 후기 가야의 맹주로 군림하며 가야 멸망 최후까지 신라의 정복전쟁에 맞설 만큼 강성했다. 그에 걸맞은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웠지만, 지금 우리 국민은 '가야' 하면 '김해', '금관가야'만을 떠올릴 만큼 '아라가야'에 대한 인식 수준은 낮은 게 현실이다.

기자는 지난 2006년 일본에 있는 1500년 전 아라가야의 흔적과 지금 그 흔적을 찾고자 하는 일본인들을 통해 아라가야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 제시하고자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를 기획, 취재 보도한 바 있다.

현재 함안에는 세계유산 등재 추진 중인 말이산 고분군을 포함해 100개가 넘는 고분군, 그리고 12개소에 달하는 대규모 토기생산 유적과 산성 등이 뒷받침하고 있지만, 문헌 기록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아라가야사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아라가야에 대한 많은 내용이 기술된 부분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 지금도 일본 쓰누가 신사나 쓰누가 역에 가면 아라시토의 동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일본의 성씨를 적은 <신찬성씨록>을 보면 임나와 관련돼 '쓰누가 아라시토'에서 비롯된 '대시수', '청수수', '쇄전수' 등의 성씨가 있어 아라가야가 고대 일본에 진출한 것을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밝힌 '아라'라는 나라 이름이 고대에 강을 뜻하는 '아리라'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내용과도 상충하지만, 일본에 건너가 철기문화를 전파시킨 '천일창'이라는 사람이 고대 일본의 건국 왕으로서 아라가야 출신이라는 것이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 년사>에 기술된 바 있어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또 아라가야의 왕 아라시토가 임나 국왕이라면 4세기 전후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전면 수정돼야 한다는 점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왜가 임나가라의 종발성으로 들어갔다는 구절이 있는데, 임나가 아라가야이고 가라도 아라가야이면 임나가라는 곧 아라가야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일본서기> 흠명 천황 5년(544) 3월조의 임나와 관련해 백제본기를 인용하면서 "안라를 父로 하고 일본부를 本으로 한다"고 적은 구절이 그것이다. 즉, 임나가 안라로부터 탄생했고, 그 근본이 일본부라면 이는 모두 아라가야와 연관된 것으로, 이를 종합하면 오히려 아라가야의 왕자 '천일창'이 왜의 대화조정을 연 것이 되므로, 임나일본부설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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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임나일본부를 왜의 사신으로 보는 학계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가야사 복원이 왜 중요한지, 또 그 중심에 아라가야가 있어야 했는지 분명해진다.

이제 가야의 맹주국이던 아라가야를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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