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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 '희로애락' 담고 산줄기 넘는 남강 물길

[습지 문화 탐방] (9) 가화천과 방수로
상습수해지역 진주·남강 방수로 건설로 변화 맞이
홍수 피해 되풀이 끊고 1억 년 전 화석 지층 선물
사천만으로 흐른 방류수 소금기 크게 떨어트리는 등 바다 생태계에 악영향 끼쳐

2017년 07월 11일(화)
공동취재단 pole@idomin.com

◇삼계천을 넘어 사천만으로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했다.

지리산 남쪽 비탈에 떨어진 물방울은 산마루를 넘어 북쪽 비탈에서 구르지 못한다. 남강 남쪽에 있는 산줄기는 북쪽을 향해 강을 가로지를 수 없다. 단순하지만 기본이 되는 이치다. 남강은 북동쪽으로 백두대간을 감싸고 돈다. 남서쪽으로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분성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이 남강을 떠받치고 있다.

남강은 산줄기를 넘었다. 남강댐=진양호의 사천만 방수로=가화천 얘기다. 낙남정맥은 산줄기가 대체로 낮다. 아무리 높아도 해발 800m 아래다. 지금 남강댐 방수로가 나 있는 일대는 특히 낮아 200m에도 못 미친다. 방수로 위 다리(유수교)에서 서쪽 직선으로 2.2㎞ 지점에 있는 태봉산(내동면 내평리)이 190m이고, 유수교에서 동쪽 직선으로 3.2㎞ 떨어져 있는 실봉산(정촌면 대축리)은 185m다.

여기에 더해 두 산 어름은 두 가닥 물줄기까지 품었다.

북쪽 진주 내평·삼계리를 거쳐 남강과 합해지는 삼계천이 하나고 남쪽 사천 가화·반용·검정·가산리를 거쳐 사천만으로 들어가는 가화천이 다른 하나다.

진주는 예로부터 상습수해지역이었다. 진주 이전 물줄기는 남덕유산 경호강과 지리산 덕천강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진주 직전 광탄진(廣灘津=너우니, 지금은 남강댐 수몰지역)에서 합해져 남강을 이룬다. 때문에 남강 수량은 더욱 많아지고 속도는 더욱 느려지면서 상습수해지역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1936년 8월 26~28일 병자년 대홍수가 가장 심했다. 장대·봉곡동에서 제방이 터지고 진주성이 일부 무너지는 바람에 읍내 칠암·본성·남성·동성·장대동 가옥 5500채가 물에 잠겼다. 이보다 심하진 않지만 1920년과 1925년, 1933년과 1934년에도 진주는 시가지가 최대 80%까지 침수되는 홍수 피해를 되풀이 겪었다.

◇18세기 제기된 남강댐 방수로

남강은 진주를 지난 뒤 함안과 의령을 가르며 동류한 다음 낙동강과 합류한다. 여기서 멀지 않은 삼랑진(밀양)~물금(양산) 자류 구간 19㎞는 강폭이 500~800m로 좁다. 그래서 흐름은 더욱 느려져 심지어 상류로 역류하면서 홍수 피해가 더욱 커지기도 했다. 이 같은 남강·낙동강 유역의 범람 원인은 홍수 시기 남강에서 엄청난 수량이 한꺼번에 흘러가는 데 있다. 이미 터잡은 주민을 다른 데로 옮기거나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빼돌리거나 해야 했다.

방수로 뚫기 알맞은 데가 여기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도,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중앙청도 모두 낙남정맥 태봉산~실봉산 어름 야트막한 고개에 주목했다. 비탈에 북으로 흘러내리는 삼계천과 남으로 흘러내리는 가화천이 등짝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안성맞춤이었다. 고갯마루를 깎기만 하면 절로 물길이 이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다. <정조실록> 1796년 5월 8일 자 기사를 보면 장재곤(張載坤)이 용동궁(龍洞宮=정조 어머니 혜빈 홍씨)에게 바친 말이 나온다. "진주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에서 물길을 뚫어 물을 사천 바다로 흘러가게 하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령·밀양·진주·성주 열세 고을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바다와 2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뚫어 통하게 할 거리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조는 비변사를 통하여 경상도관찰사의 보고를 받았다.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탐색하고 수령을 착실히 살펴보게 했더니 지역의 형세와 백성의 뜻이 전혀 달랐습니다. 장재곤이라는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도 않으며 행동이 허황됩니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

남강댐 방수로 공사는 뜻밖에 이런 선물도 안겼다. 1997년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된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다. 1억 년 전 지층으로 너비는 150m고 길이는 2㎞다. 방수로 내려고 고갯마루를 깎는 바람에 그 아래 화석 지층이 드러났다. 손가락뼈·발가락뼈·궁둥이뼈·이빨 등 공룡 화석이 100점 넘게 나왔다. 오래된 토양층·나무(규화목) 화석, 숯 화석, 중생대 여러 생물의 생활흔적 화석도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공룡 뼈 화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장소로 옛날 공룡의 서식환경과 화석화 과정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 밝히고 있다.

굴껍데기로 보이는 화석들.

화석은 천연기념물 지정 지역 바깥에서도 숱하게 보인다.

초당 최대 3250t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방류수에 지정 지역 안에 있던 화석이 휩쓸려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그런 방류수에 바닥이 파이면서 새롭게 드러났다. 30년 전만 해도 가화천 어귀 사람들은 여기서 구한 규화목(나무화석)이 하나둘 정도 집안에 없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굴 껍데기나 공룡알 화석처럼 보이는 것들이 곳곳에 있다. 여기에 와서 화석이 박혀 있는 일대 바위들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노닐면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화천에 남은 사람살이 자취

가화천은 조선 말기에 이미 육상 운송과 해상 운송이 서로 전환되는 지점이 되어 있었다. 영조는 1760년에 진주목 사천군 장암리에 가산창을 세웠다. 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사천·고성·의령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여기 쌓았다가 이듬해 5월 15일 이전에 바닷길로 서울까지 실어날랐다. 이 가운데 진주에서 거둔 세곡은 광탄(너우니) 나루를 먼저 건넌 다음 삼계천을 거슬러 낙남정맥을 넘었다. 그러고는 가화천을 타고 가산창에 가서 짐을 풀었다. 가산창은 1002호 지방도 옛 도로가 가화천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 동쪽의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는 언저리에 있었다.

가화천은 바닷물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붉은발말똥게라든지 새롭게 이름을 얻은 총알고둥·비틀이고둥도 살고 갯가에 갯질경이 등이 자라는 것이 상류에서까지 확인되었다. 민물이 왕창왕창 쏟아져 내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버들강아지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버들강아지는 민물 습지에나 있을 뿐 바닷가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바닥이 약간 기울어진 가화천

또 가화천 하류에서는 밀물에 때맞추어 배를 띄웠다. 어물 같은 바다 산물을 싣고 상류까지 올라와서는 들과 산에서 나는 산물을 싣고 내려갔다. 배가 닿는 나루터 근처에는 당연히 주점도 있었다. 가마터는 축동면 반용리 729-1(반룡길 26-174) 언저리에서 확인이 되었다. 차진 황토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런 사이로 그을음이 검게 끼인 흙구덩이와 질그릇 조각이 여럿 보였다. 지역 사람들은 차진 황토를 '쫀대흙'이라 한다. 쫀대흙으로 만든 그릇을 잿물도 입히지 않고 구워 팔았다. 황토로 만든 그릇 황옹(黃甕)은 양반이나 부잣집에서 쓰는 도자기가 아니었다. 상놈·천민이 막 쓰는 거친(荒) 질그릇(甕)이었다. 황옹(黃甕)은 동시에 황옹(荒甕)이기도 했다. 가화천 양옆에는 대숲이 우거져 있기도 하다. 여기 대나무로 만든 죽물(竹物)은 1970년대까지 아래위로 많이 유통되었다.

축동면 일대 가마터 유적.

◇사천만에 미친 악영향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좋은 구석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구석도 있게 마련이다. 남강댐 사천만 방수로도 마찬가지다. 남강·낙동강 유역에서는 상습 수해를 없애고 황무지를 농지로 일굴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사천만 바다에는 악영향만 크게 끼쳤다.

남강 민물은 바닷물 소금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탓에 사천만에서 바닷물고기가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조개도 짠물에서 잘 자라는 녀석은 사라지고 소금기가 덜한 데서 잘 자라는 대합·재첩이 많아졌다. 바닷물 풀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잘피 같은 물풀은 사천만을 남해 으뜸 물고기 산란장으로 유지해 온 일등공신이다. 사천만은 물풀이 망가지면서 물고기 산란장 기능을 크게 잃었다.

남강댐 방류수는 바닷물 흐름도 느리게 하고 수심도 바꾸었다. 중선포천과 사천강은 가화천보다 더 사천만 깊숙한 데 있다. 이 두 강물은 바다를 만나면서 가화천 방류수에 바로 막힌다. 물살도 느려지고 함께 실려온 흙·모래·자갈도 덩달아 가라앉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바닥이 높아지면서 사천만 이쪽저쪽은 항구 기능도 상당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천 어민은 남강댐 방류 반대 해상 시위를 해마다 벌인다. 그래도 가화천을 통한 남강댐 방류는 이어진다. 남강댐을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는 나아가 사천만 방류수량을 더 늘리려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제2방수로까지 꾀했다가 반대에 부딪히자 지금 자리에 수문을 2개 더 내고 크기도 키우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지금에서 더 늘리면 공생이나 상생에 어긋나는 일이지 싶다. 사천만은 지금 방수로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고통이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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