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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고자국 숨결 따라 호기심 넘치는 웃음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4) 고성
가야국 후예 김해 영운고 학생 가야 세력 옛 땅 상족암 찾아
최영덕 고가 독특한 우물 구경, 송학동고분군 지나 박물관으로
호국사찰 옥천사서 미션수행도

2017년 07월 13일(목)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경남도민일보가 진행하고 경남도교육청이 지원하는 2017 청소년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고성 나들이, 이번에는 김해 영운고 편이다. 가야라 하면 전기 맹주였던 김해 가락국을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고성은 전·후기 모두 세력이 상당했던 가야 세력 고자국(<삼국유사>에서는 소가야)의 옛 땅이다. 가락국의 후예 김해 영운고 학생이 같은 가야 세력이었던 고자국의 옛 땅을 찾은 것이다.

가락국은 쇠의 생산과 수출을 바탕으로 삼았고 고자국은 고성반도의 독특한 지형을 활용한 중계무역으로 힘을 일구었다. 난바다는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해안 가까운 바다로 다녔는데 그조차 육지에 견주면 힘든 길이었다. 반도의 이쪽과 저쪽에서 물건을 내려 육로로 맞은편으로 옮기는 편이 나았다. 남북으로 뻗은 고성반도의 동서 사이 목은 가장 좁은 데가 옛날에는 600m밖에 안 되기 때문이었다. 백제·중국 등 서쪽 문물과 왜·규슈·가락·신라 등 동쪽 문물이 교류하는 현장이었다.

◇상족암 일대와 학동마을 최영덕 고가

먼저 상족암군립공원 들머리에서 자란만 유람선 선착장까지를 걸었다. 다사로운 햇살 사이를 바람이 헤집고 썰물을 만났는지 파도도 적당하게 출렁인다. 바다를 향해 편평하게 펼쳐지는 퇴적암은 오랜 세월이 흘러 굳어지기 전에는 커다란 호수의 바닥이었다. 가뭄을 만났는지 말라붙은 그 위를 당대 지배자였던 공룡들이 무리지어 걸었다. 그 자국들이 공룡발자국화석으로 굳어 남았다. 두 줄로 나란한 발자국도 있고 서로 장난치거나 싸웠는지 삐대는 바람에 떡 반죽이 된 화석도 있다. 파도와 바람이 핥고 깎아 만든 상족암은 끄트머리에 있다. 코끼리(象) 또는 밥상(床)의 다리(足)를 닮은 바위(岩)다. 큼지막한 바위 곳곳에 구멍이나 기둥이 나 있고 바닥에는 구덩이가 파인 해식애(海蝕崖)고 해식동굴이다. 친구들은 탄성을 지르며 여기저기 넘나들고 사진을 찍으며 웃고 즐긴다.

학동마을 최영덕 고가 우물을 구경하고 있다.

이어 학동마을로 옮겨갔다. 동네 할매 한 분이 밀차와 함께 들어온다. 밭에 일 나갔다가 점심 먹으러 오는 길이다. 학생들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사에 할매가 웃으며 맞는다. "어데서 왔소?" "김해서 왔어예." "동네가 떠들썩하이 좋네!" 잠깐이라도 서로 부대끼며 웃고 떠드는 활기는 언제나 좋다. 뒷산에서 나는 돌과 흙으로 만든 돌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 즈음에 최영덕 고가가 나온다. 옛날 향약으로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고자 향청이 설치되었던 이 마을의 중심 민가라 하겠다. 더불어 뒤뜰로 가서 단단한 돌로 뚜껑까지 만들어 씌운 독특한 우물까지 구경하고는 돌아 나왔다.

◇송학동 고분군과 고성박물관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송학동 고분군과 고성박물관을 찾았다. 송학동 고분군은 분구묘(墳丘墓)다. 먼저 흙을 높고 둥그렇게 다져 쌓은 다음 다시 속을 파내어 무덤을 만들었다. 가야 세력권 고분 가운데서는 유일하다. 송학동 고분군을 전체적으로 보면 겉모습이 앞은 모나고 뒤는 둥글다. 일제는 강점기에 이를 두고 일본식 고분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가야 지배(이른바 임나일본부설)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 발굴해 보니 전혀 다른 분구묘가 나타났다. 

상족암 일대를 걷고 있는 학생들.

학생들은 옛날 사람들이 풍요를 빌며 고인돌에 새겼던 알구멍(性穴)을 보고는 고분군 사이를 걸어서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성박물관은 고성 지역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녹여 담았다. 과연 고성이 작은 소가야(小伽倻)가 아니라 곧은 고자(미)국이었다고 일러준다. 2007년 거류면 6세기 후반 무덤에서 나온 토기가 전시돼 있는데 '고(古)'자가 새겨져 있다. 고자미동국·고사포국·고자국의 첫 글자다. 고자국이 이룩한 수준 높은 문화도 보여준다. 새무늬청동기가 대표적인데 마흔세 마리를 기하학 무늬로 좌우대칭되도록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겼다. 고대에 새는 하늘과 땅을 잇고 죽은 이의 넋을 저승으로 이끄는 신성한 존재였다.

◇자방루가 아름다운 옥천사

미션 수행을 하며 고성박물관을 둘러보고는 바로 옥천사로 향했다. 남해안 호국사찰로 알려진 옥천사는 자방루(滋芳樓)가 아름답다. 옆으로 난 일주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있고 그 앞에는 완고하게 둘러싼 담장을 양쪽으로 거느린 2층 누각이 있다. 꽃향기가 날로 불어난다는 자방루다. 1764년 처음 지었는데, 너른 마당은 연병장으로, 담장은 방어용 성채로, 자방루 내부 공간은 군사회의 장소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남해안 호국사찰로 알려진 옥천사에서 미션수행을 하고 있는 김해 영운고 학생들.

모든 절간은 대웅전이 중심 건물이고 옥천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건물 크기로 보면 자방루는 대웅전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물론 군사용도로만 쓰지는 않았고 법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행사 때도 많이 쓰였음이 틀림없다. 미션 수행은 옥천사에서도 이어졌다. 자방루 기둥과 들보에 그려진 새와 천사와 비룡과 도깨비와 물고기를 찾았다. 단청이 흐려져 많이 희미했지만 이게 오히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재미를 더해주었다. 웃음 하나씩 빼어 물고는 여기저기 찾은 그림들 사진에 담는 보람과 함께 편하게 쉬는 즐거움도 누렸다.

옥천사는 이 밖에 하마비가 있고 천왕문은 없는 특징도 있다. 하마비는 여기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널찍하고 높다란 천왕문은 없고 좁고 나지막한 쪽문이 둘 있을 뿐인데 불교가 천대받던 그 시절 시골 양반들 함부로 횡포 부리지 못하도록 막는 목적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무려나 옛날 스님들, 호국사찰에서 승병 노릇 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겠다. 그에 더해 임금을 위하여 고급 닥종이 공납 부역까지 져야 했으니 한때는 대다수 스님 달아나는 바람에 절간이 통째 빌 만도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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