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가진 걸로 평가하는 세태
끝없는 경쟁·전쟁같은 삶 안타까워

산이나 들에는 정말 다양한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냇가나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또한 생긴 모습과 생각들도 다 제각각이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자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는 생각이 일상생활의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적 사고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생각과 가치기준의 균형을 위해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한쪽으로 치우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갈등과 불화로 복잡해진다. 이런 시간이 지속하면 편견과 고집으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 '일관성이 없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신의가 없어 거래가 어려운 사람' 등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한마디로 현실감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선비가 대감 댁 잔치에 초대받았다. 글을 쓰다 바빠서 허름한 평복 차림으로 잔치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대감댁 문지기가 선비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못 들어가게 막았다. 선비는 하는 수 없이 집에 가서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다시 오니 문지기가 "어서 오십시오, 어디서 오신 누구라 전할까요?" 하며 친절히 안내를 하더란다. 이때 대감 옆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던 선비가 갑자기 자기 옷에 음식을 놓았다. 대감이 의아해서 물었다. 선비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잔치에 초대받은 이는 내가 아니고 이 옷이라네, 껄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평가할 때 행색이나 소유물로 가늠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심화하면서 점점 더 사는 집이나 건물 평수, 승용차 종류, 소비 수준 등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의 척도로 삼게 됐다. 요즘 같은 사회가 바로 이런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와 소유 정도에 따라 '나의 존재와 가치'가 결정된다. 즉 '나=내가 가진 것'이라는 도식의 삶을 소유의 삶이라 한다.

이런 도식에서 만약 내가 가진 것이 없다면 나는 없게 된다. 여기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 대접받는 지름길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한평생 돈을 좇고 남과 경쟁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편안한 시간도 친구와 영혼을 살찌우는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일 시간도 없이 삶이 곧 전쟁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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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나 예수나 공자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하나같이 우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소유하지 않는 삶을 설법하고 실천했다. <임제록>에 이런 명구가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처하는 곳마다 내가 나 됨을 잃지 않으면 내가 임하는 곳 모두가 진실한 삶이 된다)." 인간은 끝없는 탐욕에 쉽게 물들기도 하지만 성스러운 가면을 즐겨 쓴다는 것도 직시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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