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절대다수의 노동자가 저임금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다. 거기에다 사람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는 갑의 횡포라는 것에 시달리다 보면 먹고사는 일을 떠나 인간성마저 황폐해져 제 삶을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것은 그림의 떡이고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에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갈수록 사는 게 힘들어진다. 나만 배불리 먹을 것이 아니라 함께 먹고 함께 누려야 하는데 지금의 사회여건으로는 참 그것이 어렵다. 서로에 대한 배려는 양보가 아니라 상생이고 일방적 방식이 아니라 연대방식이다. 그러기 위한 대전제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다.

우리가 진정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한다면 멀리 보고 천천히 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도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서로 마음만 바빴지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면 성자라고 하면서, 내가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라는 브라질 대주교의 말을 우리 누구든 한 번쯤은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자신이 항상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초심을 잃은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이 처음의 마음이 흩어져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갑질이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서야 내 삶의 고마움을 깨닫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마움을 얻을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이고 그 깨달음을 주는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담보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그렇게 얻은 것으로 안락을 누린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과 나에게 죄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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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노동을 했기 때문에 옷을 입고 밥 먹을 수 있다. 이렇듯 노동은 누군가의 삶을 돕는 것이다. 그런 노동자의 노동 대가가 따뜻한 저녁밥상이 되려면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값없게 만드는 사회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저녁이 있는 삶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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