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재료로 숨은 사연 담고 싶었죠"
나무로 만든 아늑한 풍경 한 조각
국내외서 '현장 접목형 미술' 작업
관객이 작품 느껴보는 '융화' 추구
아이들 뛰어놀 조각공원 조성 '꿈'

거친 껍질로 둘러싸인 투박하고 무거운 나무는 감춰둔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나듯 가볍고 유려한 몸짓이다. 천장에서는 조명을 감싸 안은 채 요동치는 물결처럼 흐른다. 곧게 뻗었던 몸통은 날렵한 선이 되어 춤을 춘다. 조명에 비친 하얀 결이 짙은 갈색 표면과 대비되어 더욱 부드럽고 섬세하게 빛났다.

"관성화된 나무 이미지를 탈피시켰다. 육중하고 정적인 느낌을 벗어나 리듬감을 살렸다."

창원시 성산구 '카페 사파동' 곳곳을 수놓은 나무를 가리키며 말하는 주인장. 그는 자연 속에서 예술을 표현하는 박봉기(52) 조각가다. 율동감 있게 그려진 나무는 헝클어지듯 늘어뜨린 그의 머리카락처럼 자유분방하다. 한 자리에서 묵묵히 버틴 오랜 시간을 비켜가듯 살아있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작가는 지난해 태풍 '차바'에 쓰러진 나무를 가져다 조형화했다. 예기치 못한 비와 바람에 꺾이기 전 분명 나무도 꿈과 희망이 있었으리라. 그는 나무의 못 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면을 들여다봤다. 불의에 뿌리 뽑힌 나무를 유연하게 다듬은 건 그 전과 조금 다른 삶을 살라는 박 작가의 배려다.

일본 나가노에서 수많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작품.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나무는 박 조각가의 주된 재료다. 돈을 들여 사지 않고 작업 현장에서 직접 구한다. 자연의 부속품인 나무는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을 준다. 숲과 들, 강, 호수에 안긴 박 조각가 작품이 풍경의 한 조각처럼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는 나무를 활용해 자연이 배경인 현장에 얽힌 이야기를 엮는다. 박 조각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에 숨은 사연이 들리는 듯하다.

2012년 프랑스 한 폐광지역을 가득 채운 물 위에 설치한 작품이 대표적이다. 휘어진 가지를 사이사이 엮어 만든 원형은 작은 텐트를 연상시킨다. 정면에선 반달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물방울 모형이다. 탄광 노동자들이 흘렸을 땀과 눈물을 형상화했다. 입구는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탄광을 드나들었을 이들의 힘겨움을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게끔 했다. 당시 영상 속에 찍힌 현지인들은 박 조각가가 직접 설치한 다리를 따라 건너가 작은 공간 속으로 몸을 굽혀 들어갔다. 갇힌 느낌에 답답할 법도 한데, 되레 웃으며 나뭇가지를 만지고 둘러봤다. 신기하고 재미난 모양이다.

탄광 노동자의 버거웠을 시간을 잠시나마 체험했으면 하는 작가 의도를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다.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관람객이 보고 판단할 몫이다. 박 조각가는 그 과정에 체험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이 만든 작품 속으로 들어가 직접 만지고 느끼며 즐길 수 있도록 조형한다.

자연에서 예술을 표현하는 박봉기 조각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나무가 박 조각가의 주된 재료다. 그는 "자연 생물이나 소리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말한다. /문정민 기자

일본 나가노에서 만든 작품이 그렇다. 숲 속 굵고 듬직한 나무 기둥을 따라 수많은 나뭇가지들을 엮었다. 안에는 계단 형식으로 통로를 만들었다. 영상 속엔 어느새 몰려온 아이들이 통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무를 만지며 타고 오르는 얼굴엔 장난기 섞인 웃음이 넘쳤다. 작품이 한순간에 놀이터로 변신한 것이다. 대만에서 흙과 짚으로 만든 작품도 마찬가지다. 습지에 지어진 누에고치 같은 모형에 작은 창을 냈다. 사람들은 작품 안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 볼 수 있다. 흙과 짚이 내어준 공간은 아늑함을 자아낸다. 작품 모형이 곤충집이거나 박 조각가는 친근감 있는 형태로 관객이 작품과 융화되도록 유도하고 소통한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어디서 본 듯한 형상에 나만의 시각을 녹여 조형화한다.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다. 자연 속 생물이나 소리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버려지거나 간벌 된, 혹은 해안가에 떠밀려온 표류목으로 만든 작품은 태양에 색이 바래고 비와 바람에 씻기고 날리기 십상이다. 어쩔 수 없이 형태를 잃는다 해도 아쉽지 않다. 박 조각가는 작품이 결국 소멸되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재료로 탄생한 산물이 자연으로 돌아간 것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야외에서 주로 이뤄지는 작업 특성상 그의 작품은 실내에서 쉽게 만날 수 없다.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상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박 조각가 작품을 최근 도립미술관 전시실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올 초 열린 'DNA, 공존의 법칙' 전시에 함께했다. 마침 그가 사는 동네에서 추진하는 행사인 만큼 주변인들에게 본인 작품을 보여줄 기회라 참여하게 됐다.

박 조각가가 2012년 대만에서 나뭇가지, 진흙과 볏짚, 대나무 등으로 만든 작품.

그가 건넨 사진 속 작품들은 주로 해외에서 다양하게 이뤄진 전시다. 국내에서는 충남 공주와 경기도 가평에서 관련 행사가 있다. 그는 대개 1년에 두 번 정도 전시회에 참여한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작업에 열중해야 하는 만큼 시간과 비용이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주로 현장에서 이뤄지는 작업에서 도구는 기껏해야 톱이나 못, 끈 정도다. 작업 시간은 짧게는 10일에서 길게는 3주가 걸린다. 박 조각가는 이와 같은 작업을 '현장 접목형 미술'이라고 일컫는다. 현장에 얽힌 이야기를 엮어 만든 작품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 의미와 가치가 가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설치 미술과는 다르다고.

공대 1학년을 다니다가 뒤늦게 미술세계로 뛰어든 박 조각가는 이와 같은 예술 활동도 있다는 것을 대중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젊은 작가 또한 눈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박봉기 조각가가 프랑스에서 나뭇가지, 송판 등으로 만든 작품. 휘어진 가지를 사이사이 엮어 만든 원형은 작은 텐트를 연상시킨다. /박봉기 조각가

"직접 손을 옮기고 다듬고 두드리는 과정을 거쳐 완성시킨 작품은 농부들이 농사짓고 수확하는 기쁨이랄까, 몸을 쓰고 움직이는 고생을 하는 것만큼 보람도 크다."

최근에 문을 연 카페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데 여념이 없는 박 조각가. 그는 자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조각공원을 조성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작품과 하나 되어 즐길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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