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건조한 도시? 편견 녹인 일상의 풍경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둘째 날 환전 위해 은행까지 도보
해변·뎃스키 공원 등 거닐며 평화롭고 가족적 인상 받아

계획 밖의 불금을 보내고 늦게 일어나도 괜찮을 법한데, 낯선 아침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한국보다 한 시간이 앞당겨져도 알람은 그 장소에 맞춘 시간으로 변함없이 울렸다. 제멋대로인 나와는 달리 참으로 자기 법칙이 확고한 시스템이다.

숙소 주인 에브게니가 집을 나서면서 아침으로 러시아 차와 빵을 내줬다. 음악을 틀어 놓고 외출 준비를 하며 틈틈이 베어 물었다. 어둠에 휩싸여 있던 발코니는 아침이 되자 유리창 가득 새로운 풍경을 드러내 보였다.

오늘은 환전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머지는 발 닿는 대로 걸으며 모두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오전 9시부터 운영하는 사미트(Саммит)은행까지 10분 정도만 걸으면 됐다.

러시아 날씨는 기온을 봐도 잘 모르겠어서 아래위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7부로 맞춰 입고 나섰다.

햇살이 좋은 날이다. 그러나 집 앞 놀이터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쌀쌀한 바람이 불어대는 탓에 돌아가서 카디건과 스카프를 더 챙겨와야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가을에 태풍이 부는 것과 비슷했다. 잘못 하다가는 짧은 여행 기간에 감기라도 걸릴 판이었다. 그런 억울한 사정은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번 걷는 여행은 구글 지도가 크게 한몫했다. 은행까지 길을 다 찾아 놓고 티그로바야의 언덕길을 내려갔다. 집 바로 밑에 꽤 호화로운 한식당 겸 노래주점이 있었다. 길가에는 빈 곳 없이 자동차들이 주차를 해놓고 있어 내려오는 차들을 신경 쓰며 걸어야 했다. 발음은 할 줄 알아야지, 하며 여행 오기 2주 전부터 공부한 러시아어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읽어 봤자 뜻은 모르는 반쪽짜리 실력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덜했다.

한 블록을 내려가자 저 아래에서 바다가 거대한 현수막처럼 출렁이는 게 보였다. 은행까지 가는 거리보다 바다 쪽으로 잠시 빠지는 거리가 훨씬 짧아서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고 광장을 통과해서 또 계단을 내려갔다. 지난밤에 여기도 걸었던 것 같은데 그때 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광장에서 나오는 신나는 음악이 모든 이들의 활동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커다란 분수대가 있어 해양공원 중에서도 이 광장을 폰탄(Фонтан·분수)이라 부른다.

분수대를 가운데 두고 어린이들이 저마다 탈 것 위에 올라 토요일 아침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부모들은 근처 벤치에 앉아 간혹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해변의 모습은 또 어떤가. 바람이 차갑긴 하지만 햇살이 그 못지않게 뜨거워서 몇몇은 비키니만 입은 채로 누워 있었다.

해변 가까이 있는 덱에는 여행자로 보이는 한 청년이 배낭을 끌어안고 오랜 시간 동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뭐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분명히 '무미건조한 블라디보스토크'란 말을 들었는데…. 지인은 일부러 나의 기대치를 낮춰서 여행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훑어본 해양 공원의 풍경은 이곳에 대한 나의 온도를 확실히 누그러뜨렸다. 이렇게도 가족적이고 평화롭고 안전한 모습이 만연할 줄은! 긴장했던 마음마저 풀리고 나도 그들처럼 따뜻한 햇살만 품었다. 사진을 찍고 덱에 앉아 있다가 벤치로 자리를 옮겨 글을 썼다.

광장의 중앙 바닥에는 노란색 테이프로 그려진 트랙이 있었다. 저게 뭘까 하는데 별안간 네 명의 아이들이 나타나 온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간다. 멀어지는 아이들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결승선이 있었고, 이 시합을 마련한 청년들과 아이들의 부모들이 경주를 펼친 어린 선수들을 격려해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진을 담을 요량으로 그다음 참가자들을 기다렸다. 참여를 결심할 시간이 충분히 지나가자 또 다른 아이들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트랙의 중간 부분 밖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모두 진지한 눈빛이었다. 두 번째 아이가 일등 아이만 보고 달리더니 결국 트랙 밖의 코카콜라 자판기로 돌진하고 말았다. 철제 몸통에 바퀴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뒤에 오던 아이들이 쳐다보다가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고 넘어진 아이는 울지도 않고 비장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일으켜 침착하게 경기를 이어갔다. 부모와 청년들은 이 아이를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바다를 따라 걸어가면 관람차와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뎃스키 공원(Detskiy Park)이 나온다. 직접 기구를 타지는 않았지만 훈훈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다. 무표정한 러시아 사람들도 아이 앞에서는 꽁꽁 언 바다에 봄이 온 것처럼 표정이 녹아 흘렀다. 매연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이긴 하지만, 놀이공원의 건축물들이 공기를 바꿔 놓는 것만 같았다.

가려던 은행은 해양 공원에서부터 계속 직진만 하면 되었다. 해양공원에서 이어진 거리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바트 거리였다. '푸틴 제독 거리(Admirala Fokina Street)'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아르바트 거리라고 부른다.

원래 그 이름은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예술가들이 살던 곳으로, 이 거리에 예쁜 카페와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관광객들이 '아르바트 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 하는 여행이니 속도도 나에게 맞추면 되어서 발에 무리가 가는 것 같으면 주저 없이 벤치에 앉아 쉬면서 움직였다.

은행에는 두 개의 창구가 독립된 방 형식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창구 밖에는 무뚝뚝하지만 정중한 경찰이 손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을 존중하는 무해한 여행객임을 알리고 싶어 예의 바른 아침 인사를 전했다. 환전한 돈을 가죽 재킷 안주머니 깊숙이 넣고 은행을 나섰다. 이제서야 배고픔에 대한 책임이 느껴졌다. 정해 둔 목적지는 없었다. 이 도시 건물들의 바랜 페인트 속으로 들어갔다.

/글·사진 시민기자 박채린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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