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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유럽서 마주친 특별한 행운

박채린 청춘여행 (4) 블라디보스토크서 보낸 하루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작과 끝 '여행 성지' 블라디보스토크 역
역사 주위 혁명광장·개선문 도시 특유의 색감에 매혹돼
141년 역사 토카레브스키 등대 웨딩사진 촬영지로 이름나

2017년 10월 02일(월)
시민기자 박채린 webmaster@idomin.com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오래된 토카레브스키 등대 가는 길. 육지에서 등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으로 금각만의 바다가, 오른쪽으로 아무르만의 바다가 펼쳐졌다. 속이 시원해지는 투명한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파도가 올라오는 부분과 그 너머까지 바다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다. 양옆으로 두 바다로 향하는 얕은 수심의 자갈 해변이 시작된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아무리 뛰어도 부서지지 않는 광활한 얼음판으로 변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송전탑이 상상 이상으로 높게 솟아 있다. 탑이 있는 곳에서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바닷길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다시 등대로 걸어갔다. 141년 동안이나 묵묵히 버틴 작은 등대로 걸어가는 내내 양옆으로 끝을 모르는 두 바다가 서로서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새 발이 아프다는 사실마저 잊고서 '걷지 못할 곳을 특별한 행운으로 걷는 기분'을 마음껏 느꼈다.

등대에 도착해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등대는 극동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웨딩사진 촬영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눈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등대는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토카레브스키 등대

정오가 다 되어가자 밀물이 슬슬 차오르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근처로 가서 얼른 맛있는 점심도 먹고 싶었다. 되돌아갈 길이 까마득했지만 그것 또한 내가 걸은 길에 대한 책임이었다.

루스키 섬과 토카레브스키 등대를 뒤로하고 처음 도착했던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기에 가장 먼저 오는 버스에 올라 좌석에 온몸을 내던졌다. 샌들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근육을 풀었다. 등대로 가면서 끊겼던 3G도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배고픔도 찾아왔다. 그리고 몇 시간 전에 급했던 화장실도 다시 생각이 났다. 모험의 피로를 풀 멋지고 맛있는 곳을 생각하니 다시 기운이 샘솟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피로를 잊게 하는 이런 기대감이야말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오늘도 우연이 주는 선물을 달게 받았다.

건너뛴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듯 나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했다. 지나가 본 길이라 그런지 토카레브스키 등대로 향할 때보다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오후 1시, 아침 먹은 것도 소용없이 뱃속은 다시 초기화 상태로 돌아갔다. 밥을 먹을 수 있는 카페를 알아보다가 심상치 않은 이름의 가게를 찾아냈다. 역을 둘러보고 난 후에 늦은 점심은 그곳에서 해결하자고 마음먹었다.

기차역 앞은 버스와 택시로 가득했다. 버스 기사들은 무심한 눈길로 담배를 피워댔고, 택시 기사들은 손님들을 태우려고 온화하고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버스에서 내려 몇 발짝 걷지 않은 나에게도 웬 택시 아저씨가 자기 차에 타라고 미소를 띠며 접근했다. 이봐요, 아저씨. 난 방금 여기 도착했다니까요! 나는 그보다 더 온화한 눈을 하고서는 고개를 저으며 역 쪽으로 걸어갔다.

러시아어로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아름다운 빨간 글씨가 박혀 있는 크림색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를 기점으로 모스크바까지 시간대가 7번이나 바뀌는 9288㎞의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는데, 그 방대함에 비하면 턱없이 아담한 입구였다. 계단을 올라가 반대편 길을 한 번 바라보고는 문을 열었다. 예상 밖으로 앙증맞은 이미지에 마음이 녹아버린 나는 예쁜 장난감 가게라도 되는 듯 활짝 들어갔다.

하지만, 곧 무장한 경비원들의 무자비한 눈빛에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입구부터 보안 검색대가 펼쳐져 있었다. 갑작스레 달라진 풍경에 허둥지둥 배낭을 내려놓았다. 카메라 스트랩과 가방 끈은 이럴 때만 서로 엉겨 붙고 난리다. 곧 위험할 게 없는 여행객이란 게 밝혀졌다. 나는 경비원들에게 웃으며 러시아어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그들도 무서운 표정을 거두고 따뜻한 미소를 내어주었다. 역 내부는 크림색과 에메랄드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러시아 상징이 가득한 멋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정면 위쪽에는 러시아의 힘을 나타내는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보였다. 해가 가장 밝을 시간의 햇살은 어느 때보다 역 내부를 환히 밝혔다. 여행객들로 붐빌 줄 알았는데, 한산한 풍경이었다. 방금 도착한 가족들이 대기실을 지나쳐 블라디보스토크의 품으로 들어갔고, 곧 떠날 예정인 청년은 음악을 들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역의 모습은 1912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프스키 역이 지어지면서 그곳과 비슷하게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로슬라프스키 역을 떠난 사람은 다시 야로슬라프스키 역에 도착한다'는 농담이 유행했단다.

그들의 말처럼 9000㎞를 이동해서 만나는 똑같은 모습의 처음과 끝은 무한히 여행하는 도돌이표 같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그렇게 지구의 4분의 1을 쉬지 않고 달리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수많은 여행객에게 '꿈의 여행'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건물을 나와 플랫폼이 보이는 다리를 걸어갔다. 나의 발아래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묵직하고 긴 역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위에 있는 동안 운 좋게도 기차 하나가 통과했고,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과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뒤편의 건물로 들어가니 상점가와 식당들로 가득 붐볐다. 보이지 않던 여행객들은 이곳에 숨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까 미리 찾아보았던 카페의 이름은 바로 '시크릿 스폿(Secret Spot)'. 요가&서프&비건 카페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웰(Swell)'이라는 서프(surf)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이 카페를 만들었다. 세계 어딜 가나 서핑하는 사장님들은 십중팔구 바다에 나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1층에는 기념품을 팔고 있었고, 2층에 카페가 있었다. 벽에는 서핑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나무 서프보드 테이블이 계단 쪽에 놓여 있었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서핑 유화 그림이 숨어 있었다. 나는 커피와 가지 스테이크를 시켜서 배를 채웠다.

개선문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기찻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로 마음먹었다. 혁명 광장을 포함해 C-56 잠수함 박물관, 군함 박물관, 정교회, 개선문 등 주요 관광지들이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든 걸어가도 상관없었다. 이곳 특유의 색감이 묻어나는 건물들을 보고 있으니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설명이 더욱 와 닿았다. 군함 박물관은 실제 군함을 둘러볼 수 있게 해놓아서 나는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다. 새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장면을 눈에 담았다. 걷다 보니 '영원의 불꽃'이 보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광장에 있었다. 그 뒤로 정교회가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피터 브로더릭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 머물렀다. 유난히 타닥타닥 소리가 크게 들리는 촛불과 열심히 성호를 그으며 성경을 읽고 있던 아주머니 덕분에 순식간에 감정이 몰입되었다. 오래도록 서 있다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질문들을 떠올렸다가, 그림 속 성인들의 눈을 마주쳤다가, 50루블을 헌금하고 나왔다.

영원의 불꽃

개선문도 웅장함보다는 멋진 장난감 궁전처럼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9월의 마지막 주말은 '호랑이 날(Tiger Day)' 축제가 열린다. 행진과 공연, 스포츠 경기 등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맑고 청명해서 이 나라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긴 연휴 중에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면 일본보다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로 며칠간의 산책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사진 시민기자 박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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