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첫날 저녁에 벽소령에 올랐다. 벽소명월(碧宵明月)이라는 말은 참 어렵지만, "옥돌처럼 짙푸른 하늘에 달이 떠 비추는 푸르스름한 달빛"이라는 해설은 쉽다.

그런 밤하늘과 달빛 아래에선 조용한 시 낭송이 제격이겠지만, 해발 1400m 백두대간 꼭대기 벽소령대피소 앞마당은 사람들의 저녁상으로 시끌벅적하다. 라면 한 그릇으로 고독을 달래는 단독 산행자도 있고, 달빛을 피해 붙어 앉은 커플도 있고, 식당을 옮겨온 듯한 만찬으로 생일파티 구호를 외치는 단체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서 자리를 정리하고 침상에 들어서 주기를 바라는 공원관리자들도 있다. 그러나 9시 소등시간까지도 도착하지 않은 예약자들에게 위치를 묻는 안부전화를 해야 한다.

산 밑은 초가을이지만, 산 위는 이미 한창 가을이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과 같은 초가을 야생화는 이미 기력을 잃은 듯하고, 배초향, 꽃향유, 투구꽃과 같은 늦가을 야생화가 싱그럽다. 멀리 능선 끝에 보이는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이미 누런색으로 '깊은 가을'이고, 그 아래 촛대봉, 영신봉은 녹색 카펫에 붉은색 스프레이가 막 뿌려진 상태이다. 생명을 다하며 겨울로 가는 길목이지만 풀도 나무도 숲도 오히려 생명감의 절정을 뽐내는듯하다. 우리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발걸음은 어느새 해발 1600m에 펼쳐진 수십만 평의 세석평전에 이른다. 좁다란 고난의 길을 참아내며 오르면, 넓고 기름진 옥토가 나오고, 그곳에 푸른 학이 논다는 이상향이 청학동인데, 청학동의 후보지 중 하나가 세석평전이다. 그런 낙원에 무질서한 야영과 식물훼손이 성행하여 황폐화된 곳을 다시 본래의 경관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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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산자락에 솟구치는 안개파도는 더 맹렬해져 하산을 서두른다. 비에 젖어 빛나는 숲길에서 동행자와 주고받는 인생 이야기도 산 맛 중의 하나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거와 같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밤새 인생을 논하는 거와 같다'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몸으로부터 땀이 나간 대신에 마음에 기가 들어왔을 것이다.

지리산 예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지리산 예찬론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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