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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억새 물결 가까이 보면 아픈 역사의 흔적

[습지 문화 탐방] (10) 밀양 재악산 사자평
표충사 옛 이름은 죽림정사병 치료하는 '약수'로 유명 흥덕왕 아들도 한센병 완쾌
사자평, 억새군락지로 명성 버드나무·진퍼리새도 자생 물 있어 산중마을 이루기도
"일본인이 스키장 조성 위해 나무 베어 억새밭 된 것" 

2017년 10월 24일(화)
공동취재단 pole@idomin.com

◇재악산과 재약산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항목을 보면 "종이·차(茶)와 피리 만드는 대나무(笛竹)가 영정사(靈井寺)에서 난다"고 했다. 스님들이 생산해 조정에 공물로 바친 물품인가 보다. 영정사는 지금 표충사가 되어 있고 표충사는 재약산(載藥山)에 들어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재약산이 아닌) "재악산(載嶽山)에 영정사가 있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재약산'은 이미 1858년 제작된 표충사 지장보살탱화의 화기(畵記)에 나온다. '재약산 표충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켜 지장전에 봉안한다(載藥山表忠祠大作佛事奉安于此地藏殿재약산표충사대작불사봉안우차지장전).' 사당 표충사(祠)는 표충사(寺) 절간 안에 있다.(사당 표충사는 밀양 출신인 사명대사를 크게 모신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키고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구출해 온 공을 인정해 나라에서 세웠다. 표충사는 원래 밀양 영축산 자락에 있었는데 1839년 영정사 자리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렀다.)

억새평원. 멀리 보이는 산 가운데쯤에 층층이 억새가 들어서 있는데, 20년 전에는 밭이었다. /공동취재단

재악산은 천황산·능동산·가지산·운문산·억산·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축산·향로산 등 1000m급 산악들을 실었다는 뜻인 듯하고 재약산은 약수를 머리에 이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1960년대 만들어진 표충사 안내도를 보면 특이하게도 '약물'(=약수) 표시가 북쪽과 동쪽에 하나씩 두 군데 되어 있다. 약수는 표충사 이전 절간 이름인 영정사와 관련되어 있다.

◇신령스러운 우물과 사자평

표충사 공식 기록을 따르면 처음 시작은 654년으로 신라시대가 된다. 원효스님이 재약산에 터를 잡아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지었다(지금도 대광전 뒤편 대숲은 명품이다). 이어 인도 출신 황면(黃面)선사가 829년 삼층석탑을 세우고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다. 더불어 우물을 파고 약수를 얻어 사람들을 치료했다. 당시 임금이 흥덕왕이었는데 셋째아들이 요즘 말로 살갗이 썩어문드러지는 한센병을 앓았다. 옛날에는 문둥병이라 했는데 하늘이 내리는 형벌=천형(天刑)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황면선사한테 보내어 절간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씻고 했더니 깨끗하게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죽림정사에서 나는 산초(山草)와 유수(流水)가 모두 약초와 약수"라 하면서 신령스러운(靈) 우물(井)이 있는 절간(寺) 영정사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雨花樓)에 있는 편액 '古靈井(고영정)'은 그 흔적이다. 신령스러운 우물은 사자평과 이어진다. 재약산 정상 수미봉 동남쪽 비탈 해발 700~800m에 자리 잡은 억새평원이다(2006년 12월 28일 습지보호지역 지정). 표충사를 끼고 오른쪽으로 해서 자드락길을 오르면 산마루 가까이에서 사자교를 만나게 된다. 조그만 콘크리트 다리인데 사자평 들머리다. 여태까지는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었지만 이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한 평지가 이어진다. 사자평이다. 사자평에는 물 솟는 자리가 여럿이다. 모두 아홉 군데라 한다.

◇버드나무와 진퍼리새

사자평에서는 물억새가 대표적인 습지식물이다. 수미봉이 멀리 보이는 기슭에서 건너편까지 너르게 무리를 지었다. 한가운데로는 깊은 산중답지 않게 물이 끊어지지 않고 흐른다. 양쪽 비탈에서 물을 받아 모래나 자갈도 함께 굴린다. 이것이 표충사에서는 약물로 솟고 그 아래서는 단장천을 이룬다.

습지식물은 물억새 말고도 많다. 나무로는 먼저 버드나무가 있다. 바람 따라 파도치는 억새평원을 배경으로 삼았다. 평원 한가운데서 상하좌우로 흔들리며 곡선미를 뽐낸다. 이런 산중에서 버드나무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풀로는 억새 다음으로 진퍼리새가 꼽힌다. 줄기는 집단을 이루면서 우묵하게 자라고 뿌리는 원뿌리 곁뿌리 구분없이 수염처럼 많이 뻗어나와 흙도 움켜쥐고 물도 머금는다. 진퍼리새 뿌리가 이런 역할을 멈추면 흙도 물도 다 쓸려내려갈 것이다. 진퍼리새는 사자평을 습지로 유지시켜주는 1등공신이다.

진퍼리새가 수북한 이쪽저쪽을 헤쳐보면 흥건한 물 위로 누런 기름띠가 나타난다. 식물이 죽어 썩을 때 나오는 기름기다. 습지에서는 식물이 생명을 다하고 죽어도 완전 분해는 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분해된다. 부분 분해되고 남는 것들이 계속 쌓이면 이탄층(泥炭層)이 된다. 이는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억새와 진퍼리새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물을 머금는다.

덕분에 21일 사자평에 올랐을 때 여러 꽃들을 볼 수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한두 포기 보기가 어려운 용담도 여기서는 자주색 꽃을 매단 채 곳곳에 피어 있었다. 붉은 꽃을 방울 모양으로 매단 산부추도 적지 않았고 가는 꽃대에 하얗게 꽃이 오른 방울새난도 있었다. 바닥 가까이 줄기에서 하얀 꽃잎 다섯 장을 펼친 물매화도 있었다. 낙동강유역환경청의 사자평 감시원 이병주 씨에 따르면 동물도 크게 늘어났다. "삵은 물론 담비도 많아졌어요. 아침에 감시카메라를 보면 담비가 종종 찍혀 있어요. 목에 이빨 자국이 난 채 죽어 있는 노루나 고라니도 자주 보는데 담비가 그랬겠지요." 담비는 우리나라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호랑이(멸종) 다음 자리에 놓인다. 이씨는 삵의 똥도 알려주었는데 다가가 살펴보니 짐승털이 섞여 있었다.

◇손바닥만한 고사리분교

물이 나는 덕분에 깊은 산중이지만 마을을 이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생각처럼 다닥다닥 모여 살지는 않았다. 소설가 배성동은 답사기 <영남알프스 오디세이-억새야 길을 묻는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자평마을은 십 리 간에 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재약산 아래 양지바른 땅에 두서너 집 있었고, 주개 대가리에 한두 집, 칡밭 인근에 두 집, 또 함석 막사가 있는 사자평 목장에 두 집 정도였다."

사자교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고사리분교(정식 이름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터는 그런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처음에는 화전민이 쓰던 흙집을 쓰다가 나중에 콘크리트로 교실을 새로 지었다.

지금 건물은 사라지고 교적비만 남았다. 1997년 세운 빗돌에는 '1966년 1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 적혀 있다. 1966년이면 정부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사자평 일대로 끌어모은 시점이다. 지금도 운동장 자리는 맨땅이 드러나 있지만 교실 자리는 억새가 우거져 있다. 둘 다 손바닥만 하다. 왼쪽으로 단풍나무가 두 그루 둥글게 어우러진 모습이 멋지다. 아래에는 앉아 놀기 좋도록 바윗돌 셋이 나란하다. 아이들은 여기서 야외수업도 심심찮게 했겠지.

억새밭도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었다. 탐방로 오른쪽 골짜기 건너편에 억새밭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농사를 짓던 밭자리에 사람들이 떠난 뒤 억새가 비집고 들어가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 가서 보면 그때 사람들이 둘레에 만들었던 언덕과 두둑이 있다. 탐방로 가까이에 비탈진 억새밭에서도 사람들은 가축을 키우거나 밭농사를 지었다.

1990년대 들어 재약산을 소유하고 있는 표충사가 이들을 사자평에서 나가도록 했다. 사자평 사람들은 농사도 짓지만 자기가 기르던 가축을 장만해 등산객들한테 파는 장사도 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으뜸 가르침이다. 적어도 경내에서는 살생이 이뤄지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고사리분교는 1996년 문을 닫았고 사람이 사는 민가는 1997년에 없어졌다.

◇일제가 스키장 만들려다 생겨난 억새밭

<영남알프스 오디세이>는 201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내용은 1990년대 중반 이전, 어쩌면 80년대인 것 같다. "소장수는 억새 수풀을 헤집었다. … '허리까지 차는 억새밭 걷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비 오는 날이면 더 힘들고, 해 뜨기 전에는 아침 이슬에 옷이 흠뻑 젖어'라며 투덜거렸다. … 소장수는 '사자평은 소 천국이었어. 목장에는 풀어놓은 소가 수백 마리도 더 되었지'라고 말했다."

책에는 노인도 한 명 나온다. "노인은 자신이 사자평에서 도자기를 굽던 도공의 후예라고 밝혔다. '지금도 사자평에는 선조 도공들이 굽던 도요지가 있고, 깨어진 조각도 나와.'" 해방 전에는 도자기마을로 대엿 집밖에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많을 때는 여든 집이 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떠나고 싶어도 100만 평 넓은 땅, 검은 노다지를 두고 갈 수가 없었어. 검은 흙은 감자나 당근, 도라지, 더덕, 참나물, 고사리, 칡농사가 잘 되었지'라며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밝혔다."

노인은 작가에게 억새밭이 생겨난 경위도 얘기했다. "… 노인이 주절대는 말들의 아귀를 여차여차 꿰맞춰 보면 이러했다. 본래 사자평은 군데군데 숲이 우거졌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버리는 바람에 온통 억새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가을 정취를 물씬 일으키는 사자평도 일제식민지의 잔재라는 아픈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억새가 나무 아래에 있으면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탓인지 사람 키를 훌쩍 넘도록 자라지는 못한다.

사자평은 여러 사연을 품은 채 재약산 산마루에 바짝 붙어 있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하얗게 출렁이는 억새 파도를 보기 위해 재약산을 오른다. 하지만 사자평은 가을 아니라 언제든 그냥 거기 있다는 것으로도 우리한테는 큰 복이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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