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마자 친일·부패세력에 장악된 경남

1896년 경상남도가 경상도에서 갈라져 역사를 시작한지 121년이 지났다. 이후 경남은 일제식민지배와 해방, 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격동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때론 역사의 주역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때론 역사의 비극과 역행이 일어나기도 했다. 121년간 경남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과 이슈를 되돌아보면서 경남의 미래를 짚어 볼 기회가 됐으면 한다.

구한말 경상남도 시작… 관찰사 중 6명 '친일'

경남은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1895년 6월 23일 고종은 8도를 해체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눴다. 경상도는 안동부, 대구부, 동래부, 진주부로 나누고 전국을 339개 군으로 개편했다. 이는 당시 내각을 장악한 친일성향의 개화파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일본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을 본떠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조선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해 10월 8일 명성황후가 피살된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행정구역 개편을 주도한 친일 성향 개화파 내각이 무너지면서 행정구역 재개편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1896년 8월 4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은 칙령을 반포한다. 불과 1년 사이 다시금 행정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전국을 13개 도로 나눴는데,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누고 진주에 수부를 뒀다. 이렇게 경상남도는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경남엔 1개 부와 29개 군이 있었다. 동래부, 진주군, 김해군, 밀양군, 울산군, 의령군, 창녕군, 창원군, 거창군, 하동군, 합천군, 함안군, 함양군, 고성군, 양산군, 언양군, 기장군, 거제군, 초계군, 곤양군, 삼가군, 칠원군, 진해군, 안의군, 산청군, 단성군, 남해군, 사천군, 웅천군이었다. 그러나 급조된 행정구역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1896년 이후 거의 매년 부분적인 행정개편이 이뤄졌다. 창원군이 창원부로 승격됐다가 다시 창원군으로 환원되기도 했고, 1906년에는 뜬금없게도 울릉군이 경남에 포함되기도 했다. 1900년에는 고성군을 고성군과 진남군으로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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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경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교육기관인 공립진주보통학교(진주초등학교) 모습. 1907년 이은 황태자 책봉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다. /경상남도 교육청

혼란스러운 정황은 실록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경남도지사 격인 경상남도 관찰사를 '진주 관찰사', '진주부 관찰사', '경상남도 관찰사' 등으로 혼용해서 기록하고 있다. 경상남도 관찰사는 보통 1년 임기로 1896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까지 모두 16명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경남 출신은 한 명도 없으며, 부패가 심했다. 7대 경상남도 관찰사 이지용은 황실 종친으로 당시 불과 29살이었다. 1900년 7월 22일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 등과 함께 파면됐는데, 군수직을 놓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이들을 파면하면서 "풍속을 관찰하는 지위와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을 위임한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는 재물을 긁어 모으는 것만 일삼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지 않고 더러는 잇속만 다투면서 체면을 훼손시키고 있어 듣기에도 놀랍고 분통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2대 관찰사인 조시영은 각 군으로부터 거둔 조세 34만 냥을 유용했고, 이것이 적발된 뒤에도 유용한 금액을 갚지 않았다. 11대 관찰사 민영선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부정이 적발되어 조정에서 거듭 불러도 이를 무시하자 결국 파면당했다. 민영선의 부정을 고종에게 알린 사람이 앞서 파면된 이지용이었다.

게다가 경상남도 관찰사 중에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사람이 6명이나 된다. 이들의 이름은 이지용, 박용대, 조민희, 성기운, 민형식, 이윤용 등이다. 이지용은 경상남도 관찰사에서 파면됐지만, 이후 복직돼 정부 요직을 지내다 경술국치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도박장을 운영하는 등 방탕한 일생을 보냈다. 또한 이완용의 친형인 이윤용, A급 친일파인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도 경상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상남도 관찰사 가운데 유일하게 애국지사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5대 관찰사인 김영덕이다. 김영덕은 경술국치이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영덕 집안은 몰락했다.

의병, 계몽운동, 마산포 개항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부경남에서는 동학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이때 지역 양반들은 동학농민운동을 비판했고 고종과 봉건체제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런 양반들이 1895년 단발령과 명성황후 피살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를 '을미의병'이라고 한다. 경남에서도 함양 출신 유생 노응규가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는 1896년 2월 17일 의병을 일으킨 후 진주로 진군한 뒤 2월 20일 새벽 경상남도 관아가 있던 진주성을 점령했다.

노응규 의병대는 진주에서 세를 불린 후 동쪽으로 진군했다. 의병들은 일본상인들과 무역을 금했기 때문에 남해안 항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들은 거의 끊겼다. 이어 일본인들이 대거 거주하는 부산을 공격 목표로 잡고 진군했다. 그러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견해 양쪽은 김해평야에서 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접전에서 패하면서 노응규 의병대는 급속도로 위축됐다. 진주에서 합세한 정한용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거점인 진주성이 관군에게 넘어갔고, 의병대 선봉장 서재기는 함양 안의군 향리들에게 살해당했으며, 노응규의 부친과 형 또한 피살당했다. 결국 노응규는 4월에 의병대를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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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진주부 경남도청 앞에서 찍은 사진. / 경상남도

비록 노응규 의병대는 실패했지만 일본군과 맞설 때는 전면전을 피하고 지리산 등 산간지역을 무대로 게릴라전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는 앞으로 있을 경남지역 의병전쟁에서 의병들의 교범이 되었다.

한편, 1895년 부산에 일신여학교와 개성학교(현 부산개성고등학교)가 설립되고, 개성학교는 밀양과 마산에 분교를 운영하면서 경남지역에서도 근대적 교육의 막이 올랐다. 같은 해 조정은 '소학교령'을 반포해 전국에 초등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경남에서는 공립진주보통학교(1895, 현 진주초등학교), 사립개창학교(1897, 현 밀양초등학교), 사립육영학교(1898, 현 김해동광초등학교)가 개설되었다. 1899년에는 중학교 관제를 반포해 중학교도 곳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들은 기독교·천주교계 군수나 지역 유지에 의해 건립된 사립학교가 대부분이었는데, 1905년에는 무려 6000여 개에 달했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 등이 설립되었고 경남 곳곳에 지회를 운영하면서 토론회, 강습회, 야학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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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마산포 개항 당시 각국이 합의한 조계지역도.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는 이를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 조계지를 늘여갔다. /블로그-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1896년 경상남도 설립 직후 가장 큰 사건은 1898년 마산포 개항이다. 개항 직후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마산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마산포 개항안에는 각 국이 보유할 수 있는 조계지(외국인 거류지)는 최대 4500평으로 제한됐지만, 일본과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

선수를 친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마산포 개항 이전부터 이미 저탄장소와 해군병원을 건립하는 명목으로 개항장 인근 30만 평에 매입작전을 벌여왔다. 이에 일본 또한 상인 하사마(迫間房太郞)를 통해 토지 매입경쟁에 나섰다. 하사마는 자복동과 월영동 일대 2만 평의 땅과 자산도, 가포 일대를 매입하며 총 30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매입했다. 러시아도 창원감리를 협박해 기존 토지에다 가포지역 중 일본이 차지하지 않은 지역 약 30만 평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서 가포지역엔 러시아 조계지역이, 자복동과 월영동엔 일본 조계지역이 탄생했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 패하면서 러시아가 차지한 가포지역 조계지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보통 개항장 조계지역엔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어울려 살지만, 마산항은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완전히 장악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남도정백년사>, 경남도정백년사편찬위원회, 1996

- <조선왕조실록>

- <세계사 연대기>, YMS세계역사연구회, 역민사, 2004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 <시민의 탄생: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시각 변동>, 송호근, 민음사, 2013

- <위클리경남> 2004년 4월 3일자, [마산창원 역사읽기]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 「한말 경남지방 야학운동의 전개양상과 운영주체」,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3호, 2010

-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 홍순권 『지역사회연구』 5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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