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돼지' 전설 품은 섬 샅샅이
육지 품에 쏙 들어온 바다

창원 마산합포구 돝섬

소년은 잔뜩 들떴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길이다. 기대감으로 얼굴 근육이 자꾸 춤을 춘다.

창원 마산만, 나직하게 솟은 섬에 배가 닿는다. 앞서 걷는 아버지의 트렌치코트,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던 어머니의 온기.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에게 남은 섬의 기억이다.

돝섬은 물리적으로 가까워 오히려 자주 찾지 않은 섬이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아 충동적으로 돝섬행 배에 오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추억의 조각을 소환한다. 뭍에서 떠나며 듣기 시작한 4분짜리 노래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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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돝섬 유람선에서 본 돝섬 모습. / 최환석 기자

선착장에서 해안 길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섬의 품으로 곧장 들어가는 걸음은 잠시 아껴둔다.

바늘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따라 섬 둘레를 4분의 1가량 걷는데 '풍덩'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바다로 시선을 돌린다.

햇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이는 바다 위로 팔뚝 크기의 물고기 여럿이 솟았다 내려가길 반복한다.

장관이 펼치지는 순간, 해안가 가까이 줄지어 앉은 갈매기 떼가 보인다. 사냥에 나설 법도 한데 쳐다도 보지 않는다.

섬 한쪽에 볕이 들면 반대쪽은 그늘이 지듯, 먹이사슬에도 나름의 법칙이 존재하는 듯하다.

바다를 보다 고개를 섬 방향으로 돌리면 배롱나무 꽃과 꽃무릇 군락이 반긴다.

해안 전망대에서 보이는 뭍 풍경은 사뭇 묘하다. 한 편의 소설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급격히 바뀐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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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릇 군락. / 최환석 기자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 월영대를 노래한 10인의 시비가 놓인 숲길을 지나자 출발점인 선착장이 다시 보인다.

벌써 섬 한 바퀴다. 아쉬운 마음에 출렁다리 위에서 마산만을 바라본다.

파도가 섬을 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바다를 머금은 바람의 형태가 온몸에 전해진다. 출렁이는 다리는 가을의 리듬을 함께 한다.

1982년 돝섬은 해상 유원지로 옷을 갈아입는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해수 풀장이 들어섰고, 오락시설과 더불어 동물원·식당·야외 음악당·숙박시설 등이 마련됐다.

공원화한 지금, 섬 꼭대기에 세운 노산 이은상 '가고파' 기념탑만이 옛 흔적으로 남아있다.

9월의 돝섬 정상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아쉽게도 장미는 지고 없지만, 코스모스 군락만으로도 광경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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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돝섬 정상에 선 이은상 ‘가고파’ 기념탑. / 유은상 기자

숨은 24개의 창원조각비엔날레 작품을 찾는 일도 돝섬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공간 중심에 작품을 놓으니, 꼭 비밀의 정원을 엿보는 기분이다.

선착장에서 뭍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데 문득 돝섬 전설이 궁금해진다. <마산시사>를 참고한다.

전설은 김해 가락왕 총애를 받던 미희가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이 돝섬이고, 실은 밤마다 사람을 잡아가던 금 돼지가 바로 미희였다고 전한다.

군병 손에 죽임을 당한 금 돼지가 무학산 바위 밑으로 떨어지자 동시에 한 줄기 불길한 기운이 섬으로 향했다.

이후 밤마다 섬 주위에는 돼지 울음소리와 괴이한 광채가 일었다.

고운 최치원이 골포(마산 옛 이름) 산수를 즐기고자 월영대에 향학을 설치한 무렵, 이 괴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돝섬을 향해 활을 쏘았다.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로 나뉘어 사라졌고, 이튿날 고운이 돝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전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 추억을 찾으러 들렀다가, 신비로운 전설과 새로운 추억 한 보따리를 얻고 간다.

이날 걸은 거리 2.5km. 4322보.

통영 강구안

통영 강구안은 바다가 육지로 들어간 항구다. 문득, 시인 김광규의 시 '밤눈' 어느 구절이 떠오른다.

눈이 내려도/바람이 불어도/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바다와 육지가 서로 껴안은 풍경에는 사람이 있다. 관광객과 원주민이 뒤섞여 생동감 넘치는 곳이 바로 강구안이다.

인파가 쏠린 좁은 인도를 따라 충무김밥이니, 꿀빵이니 온갖 먹을거리가 쏟아진다. 꿀빵은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어 튀긴다. 겉에는 물엿과 통깨를 발라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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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피랑에서 바라 본 강구안 모습. / 최환석 기자

최근에는 팥소 이외에 호박, 자색고구마, 심지어는 크림치즈도 넣는다. 상점마다 지나는 객을 붙잡아 꿀빵 한 조각씩 나눠준다. 통영 옛 이름을 붙인 충무김밥은 김밥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성인 남성 엄지손가락 크기로 밥을 싼 김에, 섞박지와 오징어무침을 곁들인다.

종이에 둘둘 말아 툭 던져주는 단순함이 오히려 멋스럽다. 여러 유래가 있는데, 상하기 쉬운 탓에 밥과 반찬을 분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게마다 '원조'를 강조하고, 방송 탄 화면을 갈무리해서 내세우지만, 어느 곳을 가도 기본은 한다.

아무래도 충무김밥은 밥집에 앉아서 먹기보다 포장해서 볕 좋고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고 먹는 맛이다.

세상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쉬이 답하기 어렵다. 시장이 빠지면 섭섭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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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피랑에서 바라 본 강구안 모습. / 최환석 기자

하늘에서 내려다본 강구안이 마름모꼴에 가깝다고 치면, 통영중앙시장은 최상단 꼭짓점을 장식한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생명력이 펄떡인다. 좌우로 줄지은 상점과 길 가운데를 가득 채운 좌판에는 힘찬 몸짓의 생선으로 가득하다.

좌판 상인에게 오늘은 무엇이 좋으냐고 묻자, 빨간 대야에서 '능성어'를 꺼내 든다. 팔뚝만 한 능성어는 회갈색 바탕에 갈색 무늬가 나 있다. 연안이나 심해 바위가 많은 곳에 살며 산란기는 5~9월께다.

보통 부르는 게 값이라는 다금바리 짝퉁으로 여기는데, 능성어는 그저 능성어다. 비싼 다금바리 대체가 아니라 본연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중앙시장 뒤편 언덕으로 향한다. 동피랑이다. '동쪽 벼랑'이라는 뜻의 동피랑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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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피랑 꼭대기에 있는 동포루. / 최환석 기자

지금은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원래는 철거 예정지였다. 시는 마을을 철거하고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 동포루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2007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이 대안을 제시했다. 골목 곳곳에 그려 넣은 벽화는 새로운 숨통이었다. 소문을 타고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어느새 통영을 방문하면 꼭 들러야 할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시는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 집 몇 채만 철거하고 보존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주민의 터전은 그렇게 지켜졌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벽화로 유명하지만, 내려다보는 강구안 풍경을 일품으로 꼽겠다. 통영의 바다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 한 대목에 동의하는 바다.

이날 걸은 거리 1.3km. 2154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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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동피랑에서 만난 벽화에 유쾌함이 묻어 난다. / 최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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