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휴식 있어야 왕성한 활동 가능
침묵의 공을 닦으면 실수 적고 믿음 줘

침묵은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이다. 고요의 밤이 있으므로 삼라만상이 찬연한 낮이 있다. 정적(靜寂)의 휴식이 있으므로 왕성한 활동이 있다. 우리가 일을 당하여 잘 분별해서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일이 있기 이전의 온전한 침묵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침묵은 내 안 깊숙한 곳으로부터 비롯해 있다.

누군가를 잘 설득하려고 하면 말하기 전에 침묵의 공(功)을 닦아야 한다. 침묵이 없는 말은 공허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헤집고 들어가 움직이지 못한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나서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내면의 침묵을 지킨다.

철학자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말을 아끼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어떤 지인이 절규처럼 부르짖었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내면을 향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향하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더하여 묻는다. 왜 나는 침묵하지 못하는가? 나의 내면은 진실로 고요한가?

침묵은 세상을 살면서 불가피하게 묻어나는 마음의 때를 정갈하게 씻어주는 정화수와 같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주는 쉼터와도 같다. 거대한 나무의 땅속 깊숙한 뿌리와도 같다. 침묵을 즐겨하여 내면이 고요하면 항상 마음이 가지런해서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일의 경중(輕重)을 가려 차서 있게 대응하게 된다. 언어와 동작이 진중해서 매사에 실수가 적고 많은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선서(禪書)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일을 당해서 마땅히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을 내려놓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 결국 불가(佛家) 선방에서 말하는 참선이란 것도 알고 보면 이 침묵하는 기술의 종교적 포장이다. 언설이 유려한 설교보다 절제된 언어의 기도가 승하고 그보다 한 수 더 승한 것은 언어가 끊어진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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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부풀었던 올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뜻한 바를 이룬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고 못 이루고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기 내면의 깊숙한 곳을 응시하면서 침묵에 잠기는 일이다. 세상사란 늘 뜻과 다르게 이러할 때도 있고 저러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침묵을 놓치면 이룬 자는 교만해지고 못 이룬 자는 자책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잘 침묵하는 자는 세상사의 성취 여부에 관계없이 인생 전체를 건지게 된다. 세상일들은 침묵에 비하면 결코 큰 것이 되지 못한다. 세상일들은 침묵에 비하면 결코 값비싼 것이 되지 못한다.

침묵은 금이다. 침묵을 지배하는 자는 신(神)이 가깝다. 침묵을 정복하는 자는 마침내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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