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우리 함께 가는 게 운명이면
물처럼 자기 고집 버려야 평화 되찾아

그동안 바쁘고 분주하게 사느라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탄절과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나를 볼 기회들이 많아졌으니 건성으로가 아니라 자세히 오래 나를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모르는 것은 눈뜬장님이나 다르지 않고, 나를 제대로 알아야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제대로 보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너도 알아야 하겠지만 우선하여 나를 아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알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가로막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남이 나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리는 것인데 이기적이고 방어적인 내가 나를 포장해서 나의 벽을 높이 쌓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나를 넘어 조직화, 집단화, 대중화되면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인 '큰 나'가 되어버렸는데 여기에는 나만 있을 뿐 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제대로 알려면 괴물부터 무너뜨려야 하는데 지금 나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도 직시해야 합니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군자불기(君子不器·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소인은 자기 틀, 형식, 생각에 얽매여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을 바르게 다스리는 군자는 자기 그릇을 깨고 모든 것과 소통하고 화합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상선약수(上善若水·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인데 이 말은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또 형태가 없어서 어떤 그릇에도 순응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물이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고 언제나 그릇을 깨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모레면 성탄절인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사람들을 신의 그릇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니라 친히 신의 그릇을 깨고 이 땅에 오셨고 이것은 그릇을 깨는 것이 구원의 시작임을 만방에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얼굴이 제각기 다르듯이 생각도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목표가 같더라도 가는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각자 자기 길만 고집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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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르더라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면 서로 자기 그릇을 깨고 함께 가려는 것이 선이고, 이것이 행복과 구원의 시작입니다.

물처럼 나를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늘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것처럼 우리가 모두 다투어 자기 그릇을 깨려고 한다면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고, 남북의 문제는 물론이고 성주 소성리의 사드부대나 24개의 원자력발전소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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