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공명 얻지 못한 '한일위안부합의'
요즘 상황, 100여 년 전 치욕사 떠올라

공명과 공진은 물리학 용어이다. 모든 물체는 그 형상과 재질, 구속 조건 등에 따라 결정되는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음파로 와인 잔을 깨는 것처럼 외부 진동이 이 고유진동수에 접근해 가면 갈수록 더 격렬한 진동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공진이다. 소리의 경우에는 공명이라고 한다. 또, 라디오나 TV가 방송신호를 수신하는 것도 바로 이 공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이런 공명현상은 물리학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된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소비자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면 히트상품이 되기 어렵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유권자와 공감할 수 있는 공명장(field of resonance)을 창출하지 못한 후보가 선택받을 수 있을까?

최근 정부가 '중대한 흠결'이 있었다고 발표한 한일위안부합의도 피해자를 포함한 많은 국민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15년의 '위안부문제 한일합의문'에서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과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의 씁쓸한 잔영이 떠오른다. 먼저, '한일병합조약'을 보면 "대한제국의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完全かつ永久に)' 양여한다"고 했다. 또, 바로 그 식민지의 아픔을 청산하려고 맺은 '한일기본조약'에서도 "양국 및 양국민간의 청구권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完全かつ最終的に)'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라고 대못을 박더니, 이번에는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最終かつ不可逆的に)' 해결하기 위해 합의"했단다.

이렇게 중요한 외교문서에 '완전', '영구', '최종', '불가역'과 같은 극한의 용어까지 동원해가며 왜 이렇게 저자세로 일관했는지 한심하다. 이런 부적절한 단어를 모두 생략해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된다. 그런데도 매번 '게다가, 또, 그 위에'라는 뜻이 있는 'かつ'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우리의 자존심을 무참히 꺾어 놓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립 서비스(lip service)인지 개탄스럽다. 우리는 아직도 식민시대의 종속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1887년, 프랑스인 화가 조르주 비고(Georges Bigot)가 그린 풍자화, '낚시 놀이(A party of fishing)'가 뇌리를 스친다. 이 그림을 보면 일본과 중국이 조선(coree)이라는 물고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대립하고 있다. 또, 한 사람, 다리 위에서 이들을 지켜보면서 호시탐탐 어부지리를 노리는 러시아를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나약한 먹잇감, 조선을 둘러싸고 대치하던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미국과는 식민지 나눠 먹기 밀약을 통해 기어코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말았다.

만일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를 조르주 비고가 다시 풍자화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새로운 주인공 미국이 과연 언제까지 '착한 나라'로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대국굴기를 앞세운 중국 또한 이제 잠자는 사자가 아니다. 사드배치를 빌미로 노골적으로 한국 길들이기에 나섰다. 일본은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변신하려 하고 있고, 러시아 또한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당시 그림 속 물고기는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 중이고, 그 한쪽은 "책상 위에 핵 단추까지 놓여있다"고 큰소리다. 주변 강대국들이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만 눈길을 돌리는 요즘, 100여 년 전의 불행한 역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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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그것을 극복하는 성공의 키워드는 공명과 공진이다. 이것은 사물뿐만 아니라 사회도 활성화하고, 더 나아가 모든 국민을 다 함께 춤추게 함으로써 국력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술년,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이다. 누가 민의와 공명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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