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서만의 사건이 아닌 <은교>
'성인지 감수성의 차이' 변명도 추태

소설 <은교>에서 글쟁이인 늙은 사내와 그의 제자 덜 늙은 사내는 10대 여자 은교와 '은'밀한 성'교'를 즐기려고 줄다리기를 하다 덜 늙은 사내만 성공하더니 끝내 극한 파탄으로 끝난다. 대학생이 된 은교는, 이미 죽은 늙은 사내가 자신을 상상 속에서 탐한 사실을 알고 나서 한탄한다. "자기가 뭐가 대단하냐고." 늙은 사내가 살아온다고 해도 더 이상 자신은 대단하지 않음을 은교는 모른다. 은교의 대단함은 한때뿐이다. 여고생일 때, 즉 성경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연령대의 몸이어서 사내들이 정복 욕심을 강하게 느낄 때 말이다.

<은교>는 어린 여자를 기껏해야 수컷들 영역싸움이나 회춘 수단 또는 아무 생각도 없는 그저 살덩이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의 몸을 소비하는 소설은 흔하고 널렸지만 <은교>는 미성년자마저 성폭력의 제물로 삼는 우리 사회의 타락을 입증한다. 이런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작가의 대표작이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은, 이 나라의 형편없는 '성인지 감수성' 수준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성년 남자와 미성년 여자의 파격적인 관계가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이 사실이 아닌 픽션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은교> 작가의 추문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품의 작중인물에게서 작가를 떼어내고 서술자도 분리하여 작가와 서술자, 인물을 모두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현대소설에서 이론이랄 것도 없다. 여학생의 교복 속을 탐하지 못해 안달하는 늙은이를 그린 소설이라고 해서 누구도 그걸 작가의 생각과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독자들은 <은교>의 작가 박범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범신은 소설이론을 졸지에 허망하게 만들어버렸고 작가와 작중 인물을 떼놓지 않는 것이 이 나라에서 정확한 소설 독법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공로는 한국문학이론사에 기록해야 한다.

"누군가 맘 상처받았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 추한 행동이 폭로된 직후 박 씨는 나이 탓을 하며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몇 달 흐른 뒤엔 되레 혐의를 부인하더니, 얼마 전에는 '성인지 감수성의 차이'라는 요즘 유행어로 자신의 행동을 정리했다. 1990년대 말 전후로 페미니즘이 마초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세련된 포스트모던 지식을 입증하는 수단인 양 쓰이더니, 요즘은 '성인지'라는 까다로운 용어가 고생하고 있다. 성희롱·강제추행 혐의를 감수성의 차이일 뿐이라고 못을 친 박 씨가 다시 번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말장난으로 피해자들을 또 농락할 것인가. 여자 배우에게 성경험을 물었다고 하거나, 방송에 나와 특정 배우한테서 은교를 상상했다고 고백한 것 따위가 어떤 행동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모른다면, 박 씨는 앞으로도 '성인지 감수성의 차이'가 빚은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글만 열심히 쓰겠다고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집 밖으로 나와 여성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피해자가 생기는 일은 없을 테니.

정문순.jpg

처음에는 납죽 엎드렸다가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거나 더 불리해지는 등 상황이 바뀐 틈을 타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은 성폭력 가해를 뉘우치지 않는 자들의 속성이다. 내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본 모 정당 마산당협 소속 '잡놈'은 처음에는 반성문을 쓰더니 당기위원회에 제소되자 내가 먼저 유혹했다고 기억을 바꾸었다. 1차 가해도 모자라 2차 가해를 넘보는 성범죄자만큼은 배제해야 정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박범신은 글을 쓸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독서시장에서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가 글을 쓰며 작가의 지위를 올리는 동안의 밤은 그가 '누군가'로 통친 피해자들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