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평가자에게 권한 준 '자율책임평가제'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격이지만 효과적

필자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 올해부터 '자율책임평가제'라는 새로운 평가제도를 시행한다. 대다수 연구기관이 시행하는 연구과제 평가방법은 연구소가 위촉한 평가위원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연구 결과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자율책임평가 제도는 연구수행자가 평가를 받고 싶은 전문가들을 모시고 임의의 시간과 장소에서 연구소의 감시 없이 자유롭게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이는 연구소가 평가 권한을 피평가자인 연구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마치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는 평가가 감시와 통제 없이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래서 매우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평가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율책임평가 제도는 '신뢰'를 그 밑바탕에 두고 있다. 연구소는 평가를 받을 연구자와 평가위원들의 양심을 믿고 평가를 일임하는 것이다. 신뢰가 제대로 작동된다면 새로운 평가제도는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피평가자인 연구자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심층적인 자문과 컨설팅을 받을 수 있고, 노력한 결과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연구소는 수십 개의 과제를 한 장소에서 단시간에 평가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전문성 결여와 부실 평가를 방지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제도·규범·네트워크·신뢰 등의 무형자산을 말한다. 이 중에서 신뢰는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사회적 자본은 물적자원·인적자원과 같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소다. 사회적 자본이 잘 확충된 나라일수록 거래비용이 적고 효율성과 국민소득이 높다고 한다. 앞서 자율책임평가제의 기대효과에서 보듯 신뢰하는 사회적 자본이 충만할 때, 연구과제 평가에 들어가는 행정적 비용과 시간을 줄이면서도 평가를 매우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학기술분야의 정부 슬로건은 '사람중심 과학기술'이다. 본 슬로건에는 다양한 정책적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필자는 '신뢰하는 과학기술'로 해석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행정은 시스템 선진화 혹은 체계화라는 이름으로 연구자들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간섭하는 제도로 점철됐다. GDP 성장과 더불어 국가 과학기술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일부 소수 연구자에 의한 연구비 횡령과 유용, 논문 표절·날조와 같은 연구부정 등이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이 미덥지 못하고, 우대보다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에 맞춰 정부는 연구자들의 자율성을 통제하기 위한 많은 규제성 제도를 만들어 왔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규제의 정글에 갇혀 과도한 연구행정 부담과 조금만 실수해도 범법자가 될 수 있는 환경에 이르렀으니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연구자는 신뢰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상호 견제관계로 전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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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사람중심 과학기술 실현을 위해 연구자들을 억누르는 많은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하고, 신뢰에 기반한 과학기술 제도로 단순화하는 데 노력해 줬으면 한다.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다루는 학문이다. 많은 사람이 '과학적 근거'에 신뢰하고 수긍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가지는 지식 증명의 엄정함과 냉혹함 때문이다. 이러한 엄정한 신뢰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사회구성원 누구보다 더 높은 청렴성으로 자신의 연구과정과 결과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소속한 기관이 연구자 신뢰에 기반한 자율책임평가제를 도입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전반에 신뢰의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고, 나아가 사회 전반의 사회적 자본이 충만해 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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