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공식이 아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식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19년 3·1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일제의 무단 통치로 인한 반발,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 민족자결주의 이념 등을 운동의 결정적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 민족적 저항을 설명하려면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제는 한반도를 착취의 대상으로 봤다. 식량과 원료를 착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주와 대륙, 남방까지 뻗어나가야 한다. 그게 제국주의 시대의 '상식'이었다.

농업은 가장 확실한 착취의 대상이 됐다. 기존 쌀 품종을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일본식 쌀을 짓도록 했다. 물론 기존 농업과 풍토에 맞지 않았다. 농민들이 반발하자 헌병경찰과 면 서기, 이장 등이 모판에 심긴 모를 짓밟고 다니는 게 이 시대 일상적 풍경이었다. 불과 10년 만에 60%가 넘는 논에서 일본식 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밭에는 식량 대신 뽕나무를 심으라고 강요했다. 뽕잎이 있어야 누에고치를 대량으로 키울 수 있었고, 이렇게 키운 누에고치를 바탕으로 일본 방직 산업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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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겼고, 임야조사사업으로 산 가운데 과반이 총독부에 넘어갔다. 바다에는 신식 장비로 무장한 일본 어민들이 동남해안을 싹쓸이했다. 농민 중 최하계층인 순수 소작농 비중이 일제강점기 직전보다 약 20% 이상 늘었다. 소작료도 과거보다 더 올랐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조선인 14만 명이 사망했고, 1919~1920년 콜레라로 수만 명이 또 죽었다. 일제 식민지배로 나아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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