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때 일장기 변기 처넣어 퇴학
100여년 만에 수여된 졸업장 감격

지난 14일 밀양초등학교 졸업식(개교 120주년)에서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1898∼1958) 장군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약산의 막냇동생 김학봉 여사님이 받은 명예졸업장에는 "위 사람은 1910년 본교 2학년에 재학 중 일제에 항거하다 퇴학당한 후 의열단장과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대장으로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기에 자랑스러운 밀양인으로 귀감이 되어 탄신 120주년과 개교 120주년을 맞이하여 명예졸업장을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국민의 가슴에 항일의 의열정신을 다시 깨워준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하던 선생의 패기찬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선생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1910년 11월 3일 일왕 생일(명치)에 석정 윤세주와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넣어 퇴교를 당한 후 을강 전홍표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동화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폐교되자 표충사에서 체력단련과 심신수련을 하다 끓어오르는 항일정신을 승화하기 위해 서울 중앙학교를 거쳐 중국 천진 덕화학교 금릉대학에서 영문·철학 등을 수학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던 선생은 1919년 11월 10일 길림시 평화로 57 반씨 댁에서 13명의 동지와 역사적인 의열단을 창단한다. 의열단은 1차 밀양폭탄사건을 시작으로 부산경찰서폭탄사건, 밀양경찰서폭탄사건(1921년 9월 12일), 의열단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탄사건 등 23회에 걸쳐 폭탄을 투척한다. 의열단의 7가살 대상은 '조선총독부고관·군부수뇌·대만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이고, 5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중요기관'이다.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테러와는 근본이 달랐다.

의열단의 정신은 단재 신채호가 1923년 1월에 완성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는 약산 김원봉에게 김구 선생의 40만 원보다 많은 100만 원의 현상금(현재 300억 이상)을 걸었다.

선생이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아내이자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여사가 사망(지금 밀양시내 안장)하게 된다. 해방된 해 12월 2일 국무위원의 자격으로 고국을 떠난 지 29년 만에 선생이 전국군사준비위원회 기구인 조선국군학교 교장으로 추대돼 돌아와 친일청산의 인민군대를 정비하던 중 1946년 2월 26일 민족의 영웅이 고향 밀양으로 온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인파가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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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47년 파업 관련 혐의로 미군정 소속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를 받은 악질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자 선생은 며칠을 잠 못 자고 통곡을 했다. 그러던 중 47년 7월19일 대낮에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미군정하 친일파들이 생명을 위협함을 감지하였는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방북하여 지금까지 북한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해마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학생들과 뜻을 모아 역사기행을 하고 있고, 작년에 밀양시내 약산 생가에 의열기념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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