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 천년 세월 우려낸 향 그윽도 하다

중국 당나라 시대, 한 수행자가 조주(778~897)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주는 되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한 수행자에게 조주는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라고 말했다.

또 다른 수행자가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큰 뜻이 무엇입니까?" 이번에도 조주는 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수행자는 답했다. "한 번 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

차와 선(禪)은 곧 하나라는 선문답, 끽다거(喫茶去) 화두다. 1000여 년 전 조주의 화두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나온 삶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일까? 깨달음을 얻고자 한국 차의 시작점, 하동으로 향한다.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 /이서후 기자

◇차 문화의 시작점 = 차 전래설은 여럿이나 명확하게 기록으로 남은 것은 <삼국사기>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 차 문화 시작점은 지리산 자락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중국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나무 씨앗과 함께 돌아온다. 이를 귀하게 여긴 왕은 지리산에 씨앗을 심게 했다. 후대는 쌍계사 장죽전을 차 최초 재배지로 지목한다. 원조 시배지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하동 차 문화의 유래가 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은 하동 화개를 차 산지로 언급한다. 당시 하동에서 생산된 차는 덩이차. 고려 황실 공납차로 쓰일 정도였다.

조선 후기 하동 차는 세계 최초 완전 발효 홍차로 발전하면서 독자성을 지녔다. 하동 전통 차 농업의 우수성은 지난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사실로도 확인된다.

조선 왕실도 하동 차를 공납차로 썼다. 최고의 차를 선별하여 왕에게 바치러 가는 행렬은 진풍경. 행렬기를 든 만장을 시작으로 도가·기수·교련관·병방 군관·군졸이 따른다. 권농관·좌수·일산에 이어 현감 등이 뒤를 잇는다. 영(令)기를 든 사령 뒤로는 육방관속·관기·지방 유지가 따르고, 녹차 짐꾼의 뒤를 군관과 군졸이 지키는 형태다.

하동군에 따르면, 다원으로 신고한 곳만 100곳이 넘는다. 어느 한 곳을 쉽게 추천하기 어려울 정도. 군에서 소개하는 '다원 8경'을 시작으로 하동의 차 문화를 만끽하면 좋겠다.

이 밖에 화개면 정금리 도심마을은 최고(最古) 차 나무(현재 말라 죽음)가 있던 곳.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차싹 명(茗)' 자가 쓰여 신라시대 차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비문을 짓고 쓴 이는 고운 최치원.

하동 매암차문화박물관 차밭. /이서후 기자

◇차문화의 여정 = "녹차로 한정하지 마세요. 차, 입니다."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 관장이 힘주어 말했다. 국내 최초 차문화 박물관이라 불리는 매암차문화박물관은 자신을 1.5세대라 일컫는 강 씨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한 하동의 차는 다원과 사람, 역사가 함께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이 그렇다. 1920년대 지어진 일본풍 목조건축물에 들어가 시대별 유물을 보고 넓게 펼쳐진 매암제다원에서 숨을 한 번 고른다. 바로 옆 매암다방에서 차를 마신다.

'차례'라는 말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한국의 '다례'는 차를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한 중국의 '다예'와 계급적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는 일본의 '다도'와 다르다. 우리는 격식이 없다. 그저 자연을 옮겨와 곁으로 다가가고 끝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동야생차박물관. /이서후 기자

차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곳을 찾는다면 하동야생차박물관이다. 한국 차가 탄생한 화개에 있다. 녹차를 중심으로 차에 대한 정보와 유물이 잘 정리되어 있다. 녹차는 발효 정도에 따라 불발효차에 해당한다. 발효가 깊어질수록 황차, 홍차, 보이차로 이름 붙인다. 운이 좋으면 여러 차를 맛볼 수 있다. 아주 여린 차(우전)에서 마지막으로 수확하는 막차까지 혀에 닿는 맛과 향이 다르다.

박물관을 나서도 온통 차다. 하천을 따라 쌍계사 방향으로 걷다 보면 차시배지가 나온다. 지난겨울 워낙 추웠던 탓에 얼어 노랗게 말라버린 잎이 무성하다. 하지만 곧 새순이 돋아날 터. 그러면 하동 온 사방이 차 향이겠다.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장. /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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