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힘] 기록관리와 정치적 중립성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문 등
지난 10년간 기록관리 '위기'
조선시대 태종 때 사관 민인생
곧은 기록인의 태도, 교훈으로
삶에서 직필·곡필 갈림길 많아
과거 침묵·무지는 자성 계기로
국가기록, 공공권리로 보장해야

기록관리와 정치적 중립성은 어울리지 않지만 어울리는 말이 되었다. 공공기관에서 일어나는 일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기록관리 역시 정치의 바람에 흔들려왔던 건 사실이다. '웃프'(좋으면서도 슬프다)게도 이번 문재인 정권의 출범으로 기록관리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개방형으로 국가기록원장을 공모해 기록전문가가 원장이 되어 그동안의 일을 반성도 하고 혁신과제를 수립하고, 언론을 통해 여러 가지 의지(수자원공사 4대 강 원본기록물 파기 조사 등)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신나고 좋은 일에서 굳이 필자가 웃프다고 하는 건 지난 10년 동안 누적된 기록관리 업무의 훼손 혹은 암묵적인 무시를 활기차게 벗어나는 호(好)와 이것도 정치의 바람인가라는 오(嗚)가 교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13년 7월 19일 여야 열람위원들과 전문가들이 국가기록원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존재 여부를 재검색하기로 예정된 이날 오후 국회 본관 운영위 소위원회실에 마련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열람실'이 굳게 닫혀 있다. /연합뉴스

국가기록원 혁신방안보고서(2018. 02. 26./국가기록관리 혁신TF)에도 나타났듯이 지난 10년간 기록관리는 '제16대 대통령기록물 유출논란', '10·4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생산·관리·공개' 등의 일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그 이유에 대해선 팔이 안으로 굽는 필자에게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진취적인 생각과 행동을 취하는 국가기록관리 체계 혁신의 상황에서 필자의 '웃픈' 생각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다고 걱정하며 침식을 전폐한' 중국 기나라의 사람처럼 '기인우천(杞人憂天)'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조선시대 사관 민인생을 생각했다.

민인생. 태종 시대 사관으로 기록인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총 25번 언급되며 그중 다음 이야기는 기록인이라는 제한된 울타리를 넘어서도 큰 울림을 준다.

편전에서 정사를 들었다. 사관이 들어오려 하므로 (박석명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이) 섬돌아래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좌우에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이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뜰내로 들어왔다. 임금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하니 (민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선왕조실록 500년을 탄생시킨 조선의 사관들, 우리는 제나라 사관이던 대사와 동생들의 기록정신(제나라 사관이던 대사는 최저가 그 군왕을 죽인 사실을 기록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최저가 대사를 살해하자, 그 동생이 나타나 형이 기록했던 사실 그대로 또 기록했다. 결국 형을 따라 비참하게 죽지만 또다른 대사의 동생이 최저가 군왕을 죽인 사실을 기록하니, 이에 최저도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고 만다)을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를 가진 유일무이한 나라다.

조선시대 사관 민인생에 관한 기록이 적힌 태종실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러나 이 아름답고 흐뭇한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결국 민인생은 태종 1년 7월 11일에 문하부 낭사의 상소에 의해 변방으로 귀양가게 된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수없는 직필과 곡필의 선택에 서게 된다. 기록연구사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 경우, 단체장의 심기와 무관하게 남겨야할 기록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동료들의 감정을 거슬러 가며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말해도 되는지 등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물론 모든 일에는 강·약이 존재하며 중용의 미덕을 살려야 하지만, 어떤 일이든 선택을 강요당할 때가 있다. 또한 그 선택이 개인의 '행불행'으로 삶을 귀착시키지는 않더라도 관련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마 지난 10년간 이 땅의 기록인들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것이다. 크게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작게는 기록관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내·외부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소한 일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것 없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간혹 가다 만난 민인생을 보며 환호했고 그의 절망에 고개 돌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환호의 대가는 결국 외면이라 그 혼자 결과의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으며 우리 기록인과 대중은 침묵으로 곡필의 역사를 또다시 기록했는지 모른다.

10년이 흘러 직필을 약속하는 정권 앞에 거리낌 없이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개혁을 추진하는 이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드는 이 복잡한 감정은 곡필에 침묵 혹은 무지로 동조한 나 스스로의 반성이며 개혁이기도 할 것이다.

직필을 위해 기록은 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시민에게 용납되어야 하고 시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기록의 주인은 시민이다. 기록이 권력자의 편에서 무시든 훼손이든 용납이든 어떤 영향도 우리는 배제해야 할 것이다. 현대 기록관리 전통이 비록 짧다고 해도 나라의 압축적 성장 및 폐해 속에서 기록관리 역시 겪지 않으면 좋을 사건들을 많이 겪었고 또 그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대혁명 후 국립보존기록관(프랑스 중앙정부 기록관리기관)을 설립하고 국가기록을 공공의 권리(국가기록 책임 및 공공기록 열람을 시민의 권리로 보장)로 발전시켰던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도민 역시 기록관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도민들은 스스로를 위하는 공공기관의 업무가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그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남겨져야 할 기록과 남겨진 기록에 대한 '관심'이라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

국토부와 국가기록원, 수자원공사 관계자들이 올 1월 19일 4대 강 공사 관련 자료파기 의혹이 있는 한국수자원공사 대전 본사를 찾아 원본 대조작업을 위해 폐기문서를 회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야 기록과 기록관리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가장 무서운 군주 중 하나였던 태종 앞에서 기록과 기록관리의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민인생, 그가 그토록 바랐던 것은 향후 백성들에게 알려질 기록이라는 역사의 무게로 절대자가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하고 반성하여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무소불위의 폭군 연산군조차 "내가 두려운 것은 역사기록(史書)뿐이다"라고 했다.

시민의 힘으로 기록과 기록관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직필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당신의 권리를 외면하지 말라!!!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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