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좋아해놓고 마음 바뀌었다고 미투?"
피해 불인정 '한남'들의 자기합리화 슬퍼

검찰이 '고 장자연 사건'(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언명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 않긴 하지만 딱히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을 재수사하면서, 처음 수사에서 당시 검찰이 사건의 진실을 일부러 외면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장 씨가 유서에서 '술접대'를 강요받았다고 쓴 것에서, 그때 검찰은 술접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말했다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다. 나는 대한민국의 검찰이 술접대를 술 따르는 행위라고 생각했을 만큼 순진한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MB정권의 검찰이 한 짓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을 누구도 용납하기 힘든 몰상식으로 덮으려고 한 추악한 범죄였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여성 연예인을 동원하여 성접대(사실은 성폭력)를 주고받은 연예기획사-권력집단 공동 범죄의 진상에 다가서게 되자 서둘러 사건을 봉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했던 일이었다. '장자연 리스트'의 진상을 수사하는 것보다 그때 검찰이 어떻게 수사했는지 캐내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알맹이는 드러날 것이다. 이제라도 고인의 한이 풀려 저세상에서 편히 쉴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앞과 같은 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시의 연예기획사, 권력자들, 검찰이 아닌 다음에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렇게 쓰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젊은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알리고 싶었던 진실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상식은 때로는 불합리하거나 허점이 많다. 고 장자연 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도 남겼다. "이런 게 미투지, 서로 좋아해 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당했다고 하는 게 미투냐?" 이를 '한남'들의 미투 정의 사전이라고 봐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이런 글에서 어느덧 고 장자연 사건은 진짜와 가짜 미투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다.

장자연 사건이 성폭력에 무심한 '한남'들을 부끄럽게 하거나 자각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다. 장자연 사건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투 운동에서 가장 극점에 두어지거나 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하게 하는 사건이지만, 이 나라 '한남'들에게는 미투인 것과 아닌 것의 감별 구실을 할 뿐이며 미투 운동을 폄하하고 싶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들한테는 장자연 사건만 미투다. 피해자가 목숨을 버리거나 그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겪어야 진짜 미투라는 생각은 성폭력의 토양이 된다. 피해자가 목숨을 버려야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하겠다는 발상은 두말할 것도 없는 폭력이며, 폭력을 옹호하는 자가 그런 잣대로 성폭력을 입에 담거나 옛날 검찰의 고 장자연 사건 수사를 비난한다면 이만저만한 자가당착이 아니다.

물론 장자연 사건에 비하면 '가벼운' 미투 운동들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가벼울 뿐이다. 고인의 존재 때문에 가벼운 미투 운동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미투의 탈을 쓴 것들이 되지는 않는다. 형법이나 민법 체계는 성폭력을 여러 단계로 가르고 있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그런 등급을 따르지 못한다. '뽀뽀 미수 사건'(이 말은 얼마나 천박하기까지 한가) 등 심각한 가해나 피해를 가볍게 다루고 싶은 자들의 의도적인 작명에도 심각함이 가벼움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 정도야, 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성희롱에도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성추행을 저질렀던 교수나 성희롱을 가하고도 적반하장으로 나왔던 노동당 당원이나 내게는 그놈이 그놈일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존감을 짓밟히고도 대수롭지 않게 살 깜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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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고인의 10주기를 맞는다. 고인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목숨을 버리지 않았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울적해진다. 고인의 죽음이, 살아있거나 지속적인 피해를 겪은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한남'들의 자기합리화로 이용되는 것이 슬프다. 틈만 나면 미투가 변질했다고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미투 변질의 장본인들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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