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상봉 고대하는 최복남 씨, 1951년 1·4 후퇴 때 피란
북녘 가족 생사만이라도…이산가족 상봉 재개 바람

창원시 마산회원구 교원동에 사는 최복남(85) 할머니는 지난 1951년 1·4 후퇴 때 피란 왔다. 당시 할머니 나이는 19살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허리가 굽고 무릎이 아파 거동도 쉽지 않은 80대 중반이 됐다.

최 할머니는 통일부 '남북 이산가족 찾기' 시스템을 통해 지난 2012년 북쪽에 있을 가족에게 영상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상봉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2년 6개월째 이뤄지지 않으면서 나날이 걱정은 쌓였다. 다행히 27일 11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할머니도 다시 기운을 찾기 시작했다. 그간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는 소식을 듣고 없던 기운도 조금 나고 활기가 생겼다.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다시 생긴 덕이다"고 했다.

할머니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평안북도 강계군 단감동. 북에서 쓰던 이름은 최영숙이다. 할머니는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명딸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과수원을 하셔서 부유하게 걱정 없이 컸어. 또 아버지가 딸을 원하던 차에 내가 태어났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었지"라며 80여 년 전 기억을 꺼내 들었다.

▲ 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최복남 할머니.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유복한 환경에서 큰 걱정 없이 살던 할머니에게 한국전쟁은 끔찍한 기억이다. "전쟁이 나면서 가족들이랑 헤어진 계기는 돈 때문이었어. 아버지는 '이 재산을 두고 어딜 내려가겠느냐. 너는 큰집 따라 피란 가고 일주일 뒤에 만나자'라고 하셨지. 그게 67년이란 세월이 흘렀어."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혈혈단신으로 피란 길에 올랐다.

할머니는 3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완치가 됐지만 고령인데다 무릎이 아파 홀로 다니지 못한다. "오빠들 모두 두 살 터울이라 살아계신 분이 있을지…. 막내 오빠가 나랑 두 살 차이니까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네. 오빠들 못 만나도 기억에 남아 있는 셋째 오빠 아들인 우리 조카라도 만나고 싶다. 물론 생사확인만 가능해도 원이 없을 것 같아…." 할머니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할머니는 남쪽에 내려와서 사촌오빠가 한약국을 한 덕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했다. 가정을 꾸려 1남 2녀를 나아 키웠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속병을 앓았다. 북한에 계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숱한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북쪽에 있을 가족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고 했다.

생이별한 지 67년, 어쩌면 영영 가족들을 볼 수 없을지 모르는 할머니는 이번 정상회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 생애 마지막 기회이지 않을까? 내가 살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니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면 정말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정상회담이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통일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할머니는 '통일'이라는 말을 계속 읊조렸다.

간절한 희망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가족과 떨어져 지낸 67년이란 세월 속에 꽃다운 소녀는 할머니가 됐다.

이제 80대 노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단 한 번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3월 말 기준으로 경남에는 최복남 할머니를 포함해 이산가족 상봉을 바라는 실향민 1360명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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