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 서평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감정 날것 그대로 실으면, 되레 힘·여운 찾기 어려워
일상 대화처럼 진실성 중요, 자기 과시보단 공감 키워야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에 당구 한 게임 할래? ○○이도 온단다." 우리 셋은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자주 당구를 쳤다. 지금 우리는 글피 마흔이다.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다. 직장과 가정 때문에 다 같이 만나기가 어렵다. 친구들은 아내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밤에 나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 친구의 전화가 더욱 반가웠다.

마치 20대의 어느 날처럼 우리는 게임을 즐겼다. 어릴 적 우리는 앳됐지만, 지금은 흰머리가 나고 살도 많이 쪘다. 어쨌든 우리는 당구에 집중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너도 많이 늙었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래 게임에 진 사람이 당구비를 내지만,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내 것까지 계산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에 바로 들어가기가 아쉬웠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음료를 먹으며 더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은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였다. 버티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이 키우는 데도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심각하게 말하진 않았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잘 웃는다. 한바탕 웃고 나면 고단함이 좀 잊히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심각하게 눈물을 보이며,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고, 세상의 무거움을 토로한다면 다시는 안 만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우치다 다쓰루 지음

작가는 글을 쓸 때의 '메타메시지'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메타메시지는 겉으로 드러난 말이 아닌, 원래 말하고 싶은 메시지(속마음)를 말한다. 그날 친구를 만나며 나눴던 가벼운 대화에서 메타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힘들다거나 슬프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당구를 치고, 추억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이미 눈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서, 대화의 소재 자체로도 삶의 무게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메타메시지로 서로 삶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감정이나 메시지를 민낯 그대로 드러내면 글에 힘이나 여운이 실리지 않는다. '나 지금 슬프다', '힘들다', '피곤하다' 등의 직접적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작가들은 자신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메타메시지를 등장인물의 행동, 분위기, 대사를 통해 전달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것을 '빙산이론'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물 위에 떠있는 빙산의 윗부분만으로 빙산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유능한 작가는 짧은 대사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한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아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분히 진실하게 글을 쓰고 있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그것들을 진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빙산 이동의 위엄은 오직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라는 질문에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진실성 있는 메타메시지가 스며든 글'이라고 대답한다. 작가가 겉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말이 유치하거나 어려워도 상관없다. 다만, 그 말에 진심이 담겨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직감으로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 문단의 글쓰기도 부담스러워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온 마음을 담아 10페이지도 넘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런 글에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적는다. 수백 개의 단어에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고, 네가 있어서 기뻐'라는 메타메시지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역할에 감정이입이 될 때야만 혼신의 연기가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쓸 때, 음악가나 예술가들처럼 감정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연인에게 10페이지나 되는 글을 쓰는 사람처럼 하루키도 그 시간이 노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의식에서 나온 온전한 몰입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글에 몇 시간씩 집중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앞으로 소설가로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첫 문단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말을 다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글로써 자기 입장을 대변하고,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면 안 된다. 가장 우선은 '나'가 아니다. '너'에게 어떤 진심이 있고, '너'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싶은지가 우선이다. 그 진심만 있으면 글은 저절로 완성이 될 것이다. /시민기자 황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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