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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대궐 사람들] (2) 창원 큰선비 모연 김영규 1

올곧은 성품 과연 두고두고 공경받을 만했다
1857년 창원서 출생해
오늘날 차관에 올랐으나
나라 망하자 관직 버려
"토지 나빠 수확량 적어"
일제강점기 소작료 감면
그 됨됨이 기리는 송덕비
창원·함안 등지에 여럿

2018년 05월 17일(목)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잠리. 김해 진영으로 향하는 14번 국도를 따라가다 주남저수지 표지판을 보고 빠져나오면 곧 회전교차로다. 여기서 동읍사무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길 초입 도롯가 왼편으로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있다. 각각 김영규, 김정헌 부자(父子)의 송덕비다.

왼쪽의 작고 하얀 것이 '정삼품 김영규 권농 송덕비(正三品 金永珪 勸農 頌德碑)'고, 오른쪽 조금 검고 큰 것이 '정삼품 전 비서승 김공 정헌 송덕비(正三品 前 秘書承 金公 禎憲 頌德碑)'다. 김영규 송덕비는 1921년 세운 것이다. 김정헌 송덕비는 1934년에 세웠다. 둘 다 뒷면에 '동면소작인입(東面小作人立)'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 동면(현 동읍) 지역 소작인들이 지주인 김영규, 김정헌에게 세워준 송덕비라는 뜻이다. 당시 이들 부자는 소작료를 감면해 줬다. 일본제국주의 경제 수탈이 이뤄지던 상황으로 볼 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김영규가 1920년에 쓴 '간사인과 소작 권농 규칙(幹事人與小作勸農規則)'이란 글을 보면 소작료를 낮춘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는 후손들에게 소작인 관리를 이렇게 하라고 일러주는 지침 같은 것이다.

"본인은 3세대 동안 전해 내려온 집안의 토지를 17년 동안 끊임없이 그 마지기의 수를 계산하여 소작인의 타작량과 비교해왔다. (중략) 품질이 떨어지는 토지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작인을 잘못 감독했노라며 간사인만 책했으니, 지금에 와서 이를 밝히는 바이다. 농사를 게을리한 소작인의 탓으로 책임을 전부 돌리는 것은 형편상 그럴 수 있지만 이것을 꼭 확신할 것이 있는가. (중략) 첫째, 자손에게 본뜻을 경계하고, 둘째, 농업의 의무를 권면하며, 셋째, 소작인의 사정을 위한 것이다. 만약 이 조약을 어길 시는 예전에 닦았던 공을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니 애석하지 않은가. 실로 마음을 쏟고 공경할 중요한 일이다."

요약하자면, 토지 질이 나빠 수확량이 적으니 소작인을 책망하지 말고, 사정을 살피라는 이야기다.

관복을 입은 모연 김영규. /운경 김종두 시인

이 뜻을 아들 김정헌도 그대로 따랐다. 이는 1938년 1월 29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 허다한 지주들은 소작료를 가급적 많이 받으려고, 소작인들은 가급적 적게 바치려고 서로 다투는 이 시절에 소작인들의 감면을 요구하는 그 이상 자진하여 수백 석 소작료를 감면해 준 보기 드문 기특한 지주가 있다. 그 지주를 소개하건대 경남에서 부호로 굴지하는 창원군 창원면 소답리 김정헌 씨로서 진영 부근에서만 받는 것이 천여 석에 달하는바 재작년에도 삼백여 석을 자진 감면하였다…(후략)."

1930년 3월 20일 자로 이런 기사도 있다.

"경남 창원군 창원면 소답리 부호 김정헌 씨는 지난 십오 일에 궁춘(춘궁기)을 당하야 생계가 묘연한 빈민들에게 벼 오십 석을 갈라주었다."

기사에 나오는 김정헌은 조각가 김종영의 할아버지다. 김정헌의 부친 김영규가 바로 1회에서 설명했듯, 소답동 옥산 자락에 지금 김종영 생가를 비롯해 기와집 수십 채를 이룬 주인공이다.

김영규는 조선 왕조가 끝나가던 1857년 창원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893년 초사로 사헌부 감찰에 임명된후 대한제국 시기 중추원 의관(1898~1900), 함안군수(1901~1902), 창원부윤서리(1902), 진남군수(1902~1903), 장례원 전사(1909~1910) 등 일제강점기 전까지 두루 관직을 거쳤다.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잠리에 있는 모연 김영규(왼쪽)와 그 아들 김정헌 송덕비. 일제 강점기에 동읍 소작인들이 세운 것이다. /이서후 기자

1903년 그가 진남(현 통영과 고성 일부)군수로 있을 때 쓴, 각 면의 면장과 이장에게 알림(令各面面長里長)이란 글을 보면 관직에 몸담은 이로 그의 현실적이고 강직한 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 진남군은 조선 말기 통제영이 폐지되면서 새로 생긴 행정구역이라 아직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지금 국가 제도가 바뀌어 관찰사가 순찰을 하는 일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 뜻하지 않게 본 도의 관찰사가 본 군을 순행하니 정부의 명령이 아니면 과시 유람이다. 그 와중에 비용 이천이백 여금이나 많이 발생하게 되니 논의를 열어 호수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백성 된 도리이므로…."

김영규를 기리는 송덕비는 창원 동읍 용잠리, 소답동 김종영 생가와 사미루 앞, 용호동 용지공원을 비롯해 창원, 함안 등지에 6기 정도 확인된다. 이는 혼란스러운 구한말 그가 어떠한 목민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진남군수를 지내고 부친 병 간호를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창원에서 지내던 그는 이후 1909년 황제의 명에 따라 대한제국 장례원 전사에 임명된다. 참판, 즉 오늘날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하지만, 곧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창원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집안 일으키는 데 신경을 쓴다. 동읍에 선산을 마련하고 소답리에 집안 재실인 영모재를 지었다. 소작 권농 규칙을 지은 것, 현재 김종영 생가와 그 옆 사미루, 구문정을 지은 것도 이 이후의 일이다.

※참고문헌

<문화 유적 분포 지도 - 창원시>(창원시·창원대학교 박물관, 2005)

<사산시집 번역기>(김세욱, 미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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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후 기자

    • 이서후 기자
  • 문화체육부에서 문학/영화/연극/출판 등을 맡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