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우곡선생 문집> 제3편

손위 형님은 후곡(后谷)이란 아호를 가졌다. 가끔 후곡 선생이라 애칭으로 부르는데,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항용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근래에는 "그 근성(根性)은 바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 와 있는 것 같다.

근성이란 인간에게 뿌리 깊게 박힌 성질이라 볼 수 있다. 잡초와 같은 풀도 한여름을 지나고 나면 그 뿌리가 깊게 내려 뽑아내기 어려운데 사람의 근성도 그러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무튼 사람의 여러 됨됨이를 두고 각자의 성품(性品)의 차이라거나 근성 혹 기질이 다르다고 한다.

우곡(愚谷) 박 선생은 <논어>의 말끝에 홀연히 깨달은 바 있었고, 그것에 대해 '우곡이 사람의 기질(氣質)은 공부로써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라고 우곡행장은 설명하고 있다. 근성과 기질이 비슷한 것이라면 우곡은 그것을 힘써 공부하여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과연 사람은 스스로든 혹은 주변에 의해서든 그 근성과 기질을 바꿀 수가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의 됨됨이는 모두 다른데 그 됨됨이를 바꿀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곡선생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직접 생각한 바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그가 쓴 논설문인 '독소학설(讀小學說)'의 한 구절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문장을 익숙하게 다듬는 데 몰두하였고, 또 제자백가의 글에 마음이 빼앗겼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바야흐로 그것이 학문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점차 이전의 습관을 확실히 없애가면서 학문에 오로지 뜻을 둘 수 있었다(余少時 汨沒詞章之習 而又費心力於諸家文字 二十歲後 方覺其非 稍稍斷盡前習 而頗專意於學問)."

이로써 보면 시가와 문장에 주력하는 사장(詞章)의 학습이나 제자백가(諸子百家) 류의 공부는 도학(道學)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고, 아주 어려서 여기에 골몰하여 심력을 소비하였다고 말했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그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여 음풍농월하는 시가(詩歌)와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세상에 부합하여 공을 세우고 이익을 쟁취하는 처세술을 배우는 것이어서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굳이 우곡선생 만의 생각이 아니라 선진유학 때부터 유교의 곧은 가르침이었고, 송대(宋代)의 성리학에서 더욱 이론화된 것이다.

"나이 스물다섯에 단계를 뛰어넘어서 좇아 행하려 해도 괘도가 없음을 크게 깨닫고 발분하여 질병이나 근심거리가 있을 때 문득 이 책을 취하여 읽었다. 서른다섯에 나는 사는 것이 일정하게 정해져 정립되었고 돌아다니는 일이 없는 때이다. 나는 서른다섯 살에 <소학>에 들어가 그 사이에 어찌되었든 자못 그 의미를 얻었고, 배우지 않지만 손이 춤추고 발이 들썩이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年二十五 頓悟工程級持循之沒軌 而慨然發憤疾病憂患之隙 輒取是書而讀之 盖三十五歲 乃吾箚住立定脚底日也 吾以三十五歲入 然頭當之間 頗得其意味 而不學手舞足蹈者有之)."

스물다섯 살 때 일반적인 삶을 넘어 좀 더 낳은 단계로 나아가려 했으나 옮겨가는 데 필요한 사다리, 즉 어떤 지침이 없음을 느꼈다. 마음으로 분발하여 무엇에 기댈까 하다가 몸이 아프거나 걱정거리가 생길 때 이 책인 <소학(小學)>을 읽으며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서른다섯 살이 되니 일상생활에 분주함이 없어지고 고요하여 일없이는 나들이조차 없었다는 것이 선생의 말씀이다.

이 나이에 비로소 <소학>이 가르치는 행동 양식을 습관화하여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에 만족과 즐거움을 느껴 덩실덩실 춤출 정도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또 '독서설(讀書說)'에서 논했다. "더러 읽고 때로 생각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한밤중이라도 잠을 잊어버리고 단정히 앉아 묵은 지난 생각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하여 그것을 풀어 나간다. 이것이 이치를 궁구하는 요체인 것이다. … 독서를 함에 이미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고, 공부를 함에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비록 만권의 책을 읽더라도 다만 입과 귀로한 학문이므로 또한 무엇에 쓰겠는가(惑讀時思而未解則夜中忘寢端坐 濯去舊見別來新意而釋之 斯亦窮理之要也 … 若讀書而旣欠了窮理 底工夫又未變化氣質 則雖讀書萬卷只是口耳之學 亦奚爲哉)."

선생은 앞서 '독소학설'에 이어 독서의 방법을 논한 글에서도 사물과 현상을 궁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로써 앎에 다다르게 하고,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일치되도록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생은 자신이 직접 공부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독서는 세상의 이치를 얻는 방법이고, 나아가 이를 인생사에 그대로 옮겨 타고난 태만과 어리석음과 삿된 욕심 등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참다운 공부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책에서 천변만화의 지식을 얻더라도 앵무새 언변에 그칠 뿐이고 귀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듣게 되더라도 무용지물에 불과함을 간절히 말씀하는 것이다.

선생의 이 두 논설을 보면 자신의 공부 방법과 변화를 나타내면서 스스로 큰 변화를 이루었음을 말하고 있다.

실천을 특히 강조한 '역행설(力行說)'이란 논고의 글에서는 "그 이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진실로 자기에게 이로우면 연연하게 얽매여서 필경에는 거기에 끌려 들어감으로 구차해진다. … 그러나 이치를 밝혀 살피지 않으면 일찍이 이익을 의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 혹시 악에 빠지더라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두려운 일이다(知其理之不可爲 而苟利於己 顧戀係著 畢竟爲那引去則苟焉 … 然燭理不察則未嘗不認利爲義 … 惑陷於惡 而有所自覺者不可懼哉)"고 밝혀 선생은 도학을 제대로 공부한 선유(先儒)들처럼 힘써 실천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는 유학(儒學)이 가르치고자 하는 공부의 묘처(妙處)가 궁행(躬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중국 송대의 뭇별과 같이 많이 배출된 도학자들과 우리 조선의 곳곳에 잉태된 선비들을 보면, 그들이 실천궁행으로 거듭난 것이라 생각되는데 과연 유교의 가르침은 엄청난 파급을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치가 아닌데도 스스로 이득이라고 생각이 들면 이치를 저버리고 이(利)를 쫓아 마침내 구차한 사람이 된다고 한 것과, 특히 이치를 살펴 깨달음이 없으면 이(利)를 도리어 의(義)라고 여기고선 자기가 하는 일이 민폐(民弊)인 줄도 모른다고 한 것은 동서고금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마땅히 경책(警責)으로 삼을 만한 아주 자연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근성과 기질은 실천궁행하는 데서 어떤 변곡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실천을 위한 지침이나 근거 없이 살다 보면 자기의 행위가 착한 일인지 옳은 일이지 모르고 마냥 아집에 빠져 주변에 나쁜 해악을 끼치는 두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선생은 기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지경지(持敬識)'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고, 공경은 그 마음의 주재이다. 사람이 공경하지 않으면 사사로운 마음이 일어나 하늘의 성품을 없애게 된다. 공경은 삿됨을 허용하지 않고 양심을 보존하게 하니 불경(不敬)할 수 있겠는가(心爲一身之主宰 敬又一心之主宰 人不敬則私意起而滅天性 敬則私不容而良心自存 可不敬歟)."

"비록 한가하게 살고 혼자 있어도 엄숙하고 삼가며 스스로를 지켜 신명이 곁에 있는 듯, 하느님이 위에 있는 듯 감히 방자하고 게으른 기질이 온 몸에 더해지지 않도록 늘 엄연히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 활기 있고 또렷하게 하여 몽매하지 않게 한시라도 놓지 않아야 한다(雖在閑居獨處 莊矜自持如神明在傍 君父之在上 而不敢使怠慢放肆之氣加於四體 常儼然若思而堤起此心使活惺惺不昧無一刻放下了)."

삼가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경(敬)이란 한 마디에 모은 것이 성리학(性理學)의 큰 발명(發明)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선진(先秦)유학에서 말한 하늘을 우러르는 섬김(事天)과 두려움(畏天)보다, 인간 세상에 대한 자세인 경(敬)을 더 중시한 듯하다. 공경은 특히 외적인 세상사에 대한 측면보다 내적인 자신의 마음가짐을 먼저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성리학의 경(敬)은 특히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 삼감을 더 뚜렷이 내세웠는데, 이는 사람이 자신을 먼저 다스리지 않고는 만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를 경(敬)이란 한 글자에 모아 실천궁행하게 한 것이라 보여 진다.

선생이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고, 공경은 그 마음의 주재이다."라고 정리한 말씀은 어쩌면 애매모호한 마음(心)을 풀이한 훌륭한 명제(命題)라 여겨진다.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말은 곧 '마음이 몸의 주재'란 말이고 '용심을 부린다.'고 할 때, 그 마음속엔 삼감(敬)이 없이 멋대로 마음을 쓰게 되면 그 마음은 정처 없이 떠돌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지경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선생은 분명코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도학의 여러 경전(經傳)을 통해 스스로 익혀나갔던 것 같다.

글쓴이가 글머리에서 물었던 '기질의 변화'에 대한 의문은 우곡선생의 공부를 통해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 까 싶다. 왜냐면 우곡선생의 본래 기질은 무엇이었고, 또 어떻게 변화를 하였는지에 대해선 상고(詳考)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어쩌면 타고난 우월한 근성과 기질을 보다 함양시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지 열등한 기질을 변화시켰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마음의 때를 닦고 성품(性稟)을 기르는 수양(修養), 곧 지경(持敬)을 인생에서 견지할 수 있는 것은 현인들이며, 보통의 사람은 그 흉내를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인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곡선생을 염두에 두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으뜸의 자리를 보아야지 버금의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인생살이에 법이 없으면 질서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가르침도 성현이 내린 법도인데 이를 지키기 어렵더라도 늘 머리맡에 두는 것과 이를 업신여기는 것과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또 우곡선생이 사장과 백가의 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있었기에 그것이 갖는 한계에 대한 혜안을 가지게 되었을 터이니, 우리도 우곡의 글을 읽고 배우고 실천한다면 우곡과 같은 깨달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학문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실천으로 실현되고, 실천이 또 다른 학문의 길을 열어내는 것이 공부와 수행의 길이 아닌가 싶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곡이 말하는 기질의 변화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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