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이퀼리브리엄
'감정유발자'처단하던 주인공
오래된 축음기 음악에 '혼란'
자연·사랑 등 차츰 느끼게 돼
베토벤 교향곡 '합창' 1악장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표현
다른 영화엔 4악장 많이 쓰여
푸르트벵글러·아바도 음반
'합창'음미할 수 있는 명반

21세기 초 일어난 제3차 대전 이후의 세상. 전쟁을 일으킨 미움과 증오라는 감정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모든 감정을 통제한다.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이라 선전하지만 아직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이들을 감정유발자라 규정하고 무참히 살육하는 세상.

주인공 프레스턴(크리스천 베일)은 이러한 세상을 수호하고자 잘 훈련된 감정유발자 처단자이다. 그는 감정유발자들을 찾아내 처단하고 그들이 지닌 감정유발품, 즉 그림, 음반, 책 등을 소각하는 역할에 충실하다.

그는 감정유발자로 화형에 처해진 아내를 바라볼 때 어떠한 감정을 느꼈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라고 대답하고 '우는 친구를 봤는데 신고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아들에게 '당연하지'라고 대답한다.

그런 그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집을 읽는 파트너를 처단한 이후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다. 감정을 없애는 약물 '프로지엄'의 투약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그는 마침내 감정을 지닌 이로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감정유발자 반군을 돕게 된다.

감정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살아가는 세상 속 주인공. /스틸컷

영화의 첫 장면. 감정유발자들의 아지트를 습격하여 찾아내어 소각한 감정유발품은 바로 그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이다. 인류에게 이 그림이 가지는 인기와 가치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감정을 유발하는 물건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니 말이다. 지금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을 그 그림이 영화에서는 무참히 소각당한다.

이곳에서 예이츠의 시집을 몰래 빼돌린 동료는 자신을 처단하러 온 프레스턴 앞에서 조용히 하나의 시를 읽는다. 바로 '하늘의 천'이다.

'나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아 놓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니'

파트너를 처단하고 돌아온 주인공은 약물투여를 그만둔다. 이후 그런 그에게 감정을 일으킨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아름다운 자연이다. 악몽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막아 놓은 창문에 어리는 주황 빛깔에 끌리어 막을 걷어낸다. 그러고는 보게 된다. 주황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일출을.

자신을 처단하러 온 주인공에게 '예이츠' 시를 읽어주는 파트너.

다음으로 일으킨 감정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다. 감정유발자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집을 습격한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정을 느낀다. 사실 그녀는 이전 '예이츠'의 시를 읽어주었던 이전 동료의 연인이다. 그녀의 집에서 주인공은 감정유발품으로 가득한 방을 발견하게 되고 이 방에는 오래된 아날로그 전화기, 영사기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생소한 에디슨 축음기가 있다. 축음기에 올려진 음반을 빼 들고는 그는 조용히 이름을 불러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반을 다시 올려놓고 그녀의 방을 느끼던 주인공,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오래된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교향곡. 교향곡 9번 '합창'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그는 손에 들려 있던 것을 떨어뜨리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머리를 움켜쥔다.

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은 실러의 시에 곡을 입힌 4악장의 멋진 합창 부분을 연상할 것이다. 실제 이 부분이 영화에 사용된 예는 많다.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 <시계태엽 오렌지> 등이며 심지어 영화 <다이하드>에서 금고문이 열리는 장면에서도 울려 퍼진다.

하지만 영화에 사용된 것은 제1악장이다. 음악이 시작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도록 고요히, 그러다 점점 고조되어 주제가 등장하는 도입부는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순간을 표현하는 듯 신비롭다. 이에 많은 이들이 베토벤의 아홉 개 교향곡의 모든 악장 중 최고의 악장으로 꼽기도 한다.

오래된 축음기에 음반을 올려보는 주인공.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일단은 사람의 목소리를 교향곡에 도입한 것이 그러하고, 느린 2악장 빠른 3악장의 구성을 뒤집어 빠른 2악장 느린 3악장 구성이 역시 그러하다. 3악장 '아다지오(아주 느리게)'는 그 아름다운 선율로 인하여 악기로 노래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은 이렇듯 그저 명곡이다.

이 곡의 초연 시 베토벤은 거의 청력을 상실해 청중의 반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만들어 낸 명곡을 정작 자신은 듣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는 이러한 초연 장면을 멋지게 연출해 주었다.

음반으로는 먼저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오는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것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이끈 실황 음반으로 오랫동안 추천되어 온 명반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중단되었던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시작되는 해의 공연이니 역사적인 의미 또한 크다. 열악한 음질로 악명이 높지만 3악장의 천국 같은 선율과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몰아치는 피날레로 인하여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첫손에 꼽히는 녹음이다.

오래된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그는 '감동'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다음으로는 지휘자 카라얀 이후 베를린필의 수장으로서 악단을 이끈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음반을 들 수 있겠다. 2014년 세상을 떠나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그는 민주적인 오케스트라 운용의 모범을 보여준 마에스트로였으며 베를린필을 떠나기 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완성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 해에 두 가지 버전의 베를린필과의 전집이 발매됐다는 것이다. 하나는 스튜디오 녹음, 하나는 로마 실황. 먼저 발매된 것은 스튜디오 녹음이었으나 아바도가 스튜디오 녹음의 폐기와 실황녹음으로의 대체를 적극적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전집에 수록된 제9번 '합창'은 같은 로마 실황이다. 몸집을 줄여 날렵해졌으나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진중한 음악을 들려주며 날렵한 듯 힘찬 4악장의 합창은 좋은 녹음과 더불어 음악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근 많은 명반이 LP로 재발매되는 가운데 아바도의 이 음반이 빠르게 LP로 발매되었다는 것은 그 가치를 보여준다 하겠다.

아바도 음반 표지.

이 영화의 액션은 통쾌하지만 그려진 세상은 암울하다.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중하고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살아가는 힘이라 이야기하지만 현실에 닿으면 오직 물질로만 그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이다. 또한 집집마다 김장을 하던 시대가 끝나고 한가지 맛의 김치를 모두가 먹어야 하는 시대가 편리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한번 사라진 것은 다시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묻고 싶다.

'감정은 사치인가?' 

/시민기자 심광도

푸르트벵글러 음반 표지.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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