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예의 없고 겸손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인정한다. 나는 비교적 싸가지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 싸가지를 채우기 위해 그 유래를 찾아본 적이 있다.

싸가지는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네 가지 문에서 유래했다.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게 여겨 정을 나누는 인(仁)이 담긴 흥인지문,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의(義)를 닦는 돈의문,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며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예(禮)가 담긴 숭례문,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지(知)를 넓히는 홍지문, 이 네 가지 문에 담긴 인·예·의·지 유교 철학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싸가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실히 싸가지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윗사람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 예스맨의 예의를 갖추고 싶지는 않다.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서는 수군거리는 것이 혹시 겸손이라면 나는 겸손하기를 거부한다.

내가 꼭 갖추고 싶은 싸가지는 따로 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가엽게 여겨 정을 나누는 마음, 인(仁)이다. 측은지심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仁)의 의미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다는 건 단순한 동정심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려운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하지만 동정심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연대의식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보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책임감을 느끼고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나 또한 마찬가지. 몇 해 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갈 때도, 얼마 전 굶어서 뼈만 앙상히 남은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캠페인 영상을 볼 때도, 오늘 아침 제주도 난민 수용을 반대한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매일 지구 반대편 어디선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도, 방관자 처지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곤 한다.

마음은 있되 고통을 함께 해결하기 위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운 타인의 고통까지 책임감을 느끼기엔 나의 사회적 감수성이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에 만난 대리운전기사의 삶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7명 자녀를 둔 65세쯤 되는 대리운전기사다. 자녀 중 첫째, 둘째만 빼고 5명을 입양한 아버지였다.

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아직 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위해 밤에 대리운전 알바를 뛴다고 했다. 성인이 된 첫째와 둘째가 아버지와 힘을 합쳐 동생 5명을 건사하는 집안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임에도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입양으로 책임지는 아버지, 큰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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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월호 참사로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을 조롱하는 보수 정치인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진보와 보수의 가치로 나누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보수와 진보 이전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로 나누는 것이 먼저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정치인 앞에 보수라는 가치를 붙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말이 너무 고급스럽다고 느꼈다. 그저, 싸가지 없는 정치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제로인 정치 앞에 진보와 보수라는 고급스러운 가치를 매기고 싶지 않다. 싸가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잣대로 정치인을 평가할 생각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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