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흔 된 노병 차중극 씨…68년 전 총알 난무 전쟁터로
민족 간 비극적인 전쟁, 전우 잃고 분단 아픔까지
"두 번 다시 전쟁은 안돼…휴전선 지워지는 게 염원"

68년 전 한국현대사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했다. 동족은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포화에 희생된 이들의 가족을 비롯해 실향민, 이산가족 등 전쟁이 남긴 고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북 대립으로 70년 가까이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최근 '평화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회담에 이어 지난 12일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보장'이라는 역사적인 결과가 나왔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을 누빈 이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흐름을 어떻게 생각할까.

올해 아흔인 차중극(창원시 진해구)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터지자마자 해병 장병으로 참전했다. 70년 세월을 머금은 노병의 기억은 가물거렸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과 동족상잔의 비극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차 할아버지 기억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일상 속 평화의 가치를 되새겼다. 기사는 할아버지가 들려 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123.jpg
▲ 올해 아흔인 차중극 할아버지는 옛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6·25전쟁에 대한 단상은 또렷하다. 전장을 누비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문정민 기자

어스름이 찾아온 야산에 몸을 뉘었다. 모포 두 장을 겹쳐서 바닥에 깔았다. 나머지 한 장으로 얼굴만 내민 채 몸을 덮었다. 삐죽 튀어나온 두 발에는 두터운 군화가 신겨 있다. 옆으로 손을 뻗으면 소총이 잡혔다.

산속이라 어둠이 금세 깔렸다. 기온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란히 누운 동료 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깨를 짓누른 군장을 메고 종일 걸었던지라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한다. 까만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떴다. 문득 가족 생각이 간절해졌다.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20대 장병은 6남매 중 장남이다.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18살에 자원입대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가 진해에서 창설되자 해병대로 편입됐다. 군 생활에 녹아들기 시작할 즈음 포성이 울렸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그는 가족과 인사도 채 나누지 못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향했다. 포화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시래깃국과 보리밥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떠넘겼다.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전장으로 가는 길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을 만났다. 최소한의 가재도구만 챙기고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이들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다. 고향에 있을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 얼굴이 겹쳤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보며 총을 쥔 손에 비장함과 사명감이 배었다.

그는 해병대 최초 전투인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를 시작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마산 진동리 전투와 국군 최초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해 서울 탈환에 나섰고, 이후 원산·고성·함흥지구, 서부전선을 사수한 장단지구 전장에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운이 좋았다. 작전에 투입됐지만 실제로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 직접 뛰어들 기회가 없었다. 전선에서는 떨어진 명령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아직 소년티가 남은 병사들 얼굴에 잔뜩 긴장이 서렸다. 국가를 지키고자 참전했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웠다.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장병도 사선을 넘나드는 곳으로 언제 투입될지 몰라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 해병대 복무 당시 모습. /문정민 기자

죽음의 공포는 전쟁터에서만 찾아오지 않았다. 비교적 평온한 평일 오후, 진해에서 마산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병사들이 먹을 밥과 반찬을 차량에 싣고 마진터널을 지나 마산 양곡으로 들어설 때였다. '두두두두' 총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산속 어딘가에서 총탄 세례가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이들은 골짜기 계곡물로 몸을 던졌다. 장병도 혼비백산해 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다행히 사상자는 발생하진 않았지만, 총알 한 방에 생사가 오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목숨을 내건 전쟁터에서는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수천 번 총 쏘는 연습을 했지만 막상 적군과 맞닥뜨렸을 때 총구를 들이대지 못했다. 국군의 저항에 밀려 달아나는 인민군은 군복만 달랐지, 누가 봐도 같은 핏줄을 나눈 한민족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누군가의 이웃이었을 그들. 장병은 차마 그들을 향해 총을 조준하지 못했다. 민족끼리 비극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160㎝가 채 안 되는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에 평발인 장병은 수일간 행군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오직 철모를 벗을 수 있는 날을 손꼽았다. 하루빨리 전쟁이 멈췄으면 하고 기도했다. 그러기를 3년. 한반도를 뒤덮은 총성과 폭격이 드디어 멈췄다.

지난한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번졌다. 휴전 소식이 반가웠던 것도 잠시,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전쟁터에서 스러져간 전우들이 스쳐지나갔다. 한 덩어리였던 한반도는 결국 둘로 나뉘었다. 동고동락한 전우를 잃고 분단의 아픔을 남긴 전쟁. 그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남았다.

적군에 맞서 전장을 누볐던 20대 장병은 7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노병이 됐다. 아흔의 나이에 몸은 노쇠해졌고, 기억도 하나둘 지워져 갔다. 현관문 입구에 붙은 '국가유공자의 집 차중극' 문패만이 6·25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알릴 뿐이다.

차 할아버지는 발음이 어눌했다. 지난 삶을 회고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쟁만큼은 달랐다. 비록 세세한 부분까지 머릿속에 잔존해 있지 않지만, 전쟁에 대한 단상은 또렷하다. 할아버지는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쟁은 하면 할 수록 겁이 난다고. 삶을 빼앗고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이 땅에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몇 번을 반복해 말했다.

여든 셋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할아버지는 남은 생에 더는 바랄 게 없다. 그래도 죽기 전 소원이라면 한 가지 있다. 국토 한가운데를 관통한 휴전선이 지워지기를. 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킨 오늘날 평화를 다함께 누렸으면 하는 게 마지막 염원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