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지역 시민사회의 든든한 버팀목 박노정 시인이 4일 오후 7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오랜 병마와 싸운 후였다. 향년 69세.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온화했고, 불의에는 누구보다 강경했던 그였다. 워낙 많은 일을 해왔기에 무언가 한 마디로 수식하기에는 턱없이 단어가 모자란 이가 박노정 시인이다.
◇삶과 문학이 일치하던 시인 = 독특한 이력이었다.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던 학창시절, 느슨한 삶에 질서정연한 자극을 기대하며 학군단(ROTC)에 들어갔다.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시작됐다. 그리고 제대하던 1975년 겨울 입산, 십 몇 년에 이르는 참선 공부, 삶에 대한 탐구와 자연생활 사이에서 저절로 시와 문학에 눈을 떴다. 사람살이는 결국 '자연과 문학과 삶의 하나 됨'이라는 데 눈 뜰 무렵 결혼을 하고 속세로 나온다. 1981년 등단한 그는 시집 3권을 내는 동안 진주 민족예술인상, 개척언론인상, 경남문학상, 호서문학상, 토지문학제 하동문학상 등을 받았다.
장례기간 그의 영정 앞에는 2015년 진주문고 펄북스에서 낸 시선집 <운주사>가 놓여 있었다. 펄북스 여태훈 대표는 그를 두고 "그냥 시와 삶이 일치하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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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떠돌이 백수건달로/ 세상은 견뎌 볼 만하다고/ 그럭저럭 살아 볼 만하다고/ 성공만이 미덕인 세상에서/끝도 시작도 없이/ 가랑잎처럼 정처 없이/다만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 박노정 시인의 묘비명으로 쓰일 시 '자화상' 진주지역 시민사회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고 박노정 시인. /경남도민일보 DB |
◇대쪽 같은 언론인 = 진주신문 발행인 시절 박 시인은 강직한 언론인이었다. 진주신문은 권력과 토호세력을 견제하려는 취지로 1990년 창간한 시민주 주간신문이다. 그는 1989년 창간준비위원장을 맡았다가 이후 발행인으로 추대됐다.
창간준비위에서 일했던 권영란 전 진주신문 편집장은 당시 발행인을 모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청렴이었다고 했다. 그는 박 시인을 두고 촌지 관행이나 이권 개입 같은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에는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단호했다고 회고했다.
박 시인과 진주신문에서 함께 근무했던 서성룡 단디뉴스 편집장의 기억도 비슷하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분이세요. 당시 기사를 쓰면 송사에 휘말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시민운동가 = 박 시인은 지역사회에 불거진 불의와 관련, 자신을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다 보니 진주에 있는 거의 모든 시민단체 대표를 한 번씩은 맡았다. 그가 2005년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을 때 강행한 진주성 논개 영정 강제 철거는 불의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성정을 보여주는 대표 사건이다. 당시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친일화가가 그린 논개 영정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역 청년들의 스승 = 언론인으로 또 시민운동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던 그였지만, 후배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편안한 친구였다. 삶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체득한 그였기에 스승, 후원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85년 창립 때부터 박 시인이 도움을 많이 줬던 경상대 문학동아리 터울이 대표적인 예다. 대안교육 전문가로 '태봉고 신화'를 일궈낸 여태전 남해 상주중 교장이 바로 이 동아리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늘 소리 소문 없이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선생이 전통찻집 '아란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언제든 가면 공짜로 차를, 밥을 주시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때 찻집 경영이 힘들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백수로 지내던 여 교장을 박 시인은 집으로 들여 함께 생활했다. 당시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도 박 시인의 독특함에 이끌려 아란야를 자주 들락거렸다. 어느 날 박 시인이 채 이사장에게 청년 여태전을 소개하며 아까운 인재니 데려가 써 보시라고 권했다. 여태전 교장이 지금 같은 교육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다.
이 같은 박 시인의 사람됨은 절친한 친구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페이스북으로 올린 부고에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은 한잔 술도 넘기지 못하는 주치(酒痴)로되 갖은 난변의 술자리가 파하도록 뽓뽓이 앉아 지키고 정수리에 헌팅캡 곧추 올린 백수건달임을 자처하면서도 헛도는 세상을 참섭느라 돈 안 되는 궂은 자리엔 감초처럼 빠지지 않던 벗".
6일 오후 8시 빈소가 마련된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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