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에 가보고 싶어요. 진정한 제 고향, 양산에”

국회 등을 출입하는 이상우(49) 인천일보 기자는 어릴 적 고향 양산을 떠난 뒤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혼란스러웠다는 그는 조만간 양산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일종의 정체성 찾기랄까? 양산은 제가 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트렸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처음 일어선 곳입니다. 마음속에 늘 떠올립니다."

4살 때 양산 떠나 청도·대구로

Q. 양산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출생지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통도사 입구에 있는 양산군 하북면 순지리에서 1969년 8월 9일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이곳을 '신평'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합니다. 4살 때 양산을 떠나 운문사가 있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으로 이사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운문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문명중학교로 진학했는데, 2학년 때 대구로 또 유학을 갔죠. 거기서 경신중학교와 오성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에는 어머니 뜻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진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했죠."

Q. 목사가 될 뻔했네요. 본인 뜻과 무관했던 겁니까?

"아닙니다.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철학적인 고민을 꽤 많이 했습니다. '인간들이 가진 문제점의 근원은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화두로 안고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그 해답을 찾겠다며 기독교 신앙에도 심취한 거죠. 물론 아들 중 하나를 목회자로 만들겠다는 어머니 꿈도 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또 저 역시 꼭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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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우 인천일보 기자. /고동우 기자

Q. 어렸을 때 양산을 떠났으면 거의 기억이 없겠습니다. 양산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인가요? 지금도 누가 살고 있나요?

"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없습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늘 양산 살 때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 살 터울인 둘째 형이 7살 무렵 혼자 언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제가 겪은 일 같습니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양산은 제가 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트렸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처음으로 일어선 곳이어서 마음속에 항상 떠올립니다. 이 인터뷰를 하기 전부터 실은 양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그때마다 혼란스러웠거든요. 청도나 대구로 답하기도 했는데 고향은 태어난 곳이잖아요. 그래서 양산에 가봐야겠다…. 일종의 정체성 찾기랄까요? 양산은 원래 할머니의 친정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직업이 없던 아버지가 여기저기 다니다 양산에도 왔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양산천에 제방 쌓는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본가는 청도에 있고 친척들은 주로 창원이나 울산 쪽에 살고 있습니다."

보령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

Q. 인천일보 기자로 일하는 중이신 데 서울·수도권 쪽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자리를 잡았나요?

"그 전에 충남 보령에서 오래 생활했습니다. 10년 조금 넘게 한 군 생활 근무지가 보령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지역주간지로 일하게 됐는데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보령에서 만난 친구들 영향이 컸어요.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시민단체나 지역 주간신문에서 일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저도 그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지역공동체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됐죠. 또 2000년 16대 총선 때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함께하기도 했고 그 후 보령신문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신문기자 일을 시작했습니다."

Q. 칼럼이 기자 일을 하게 된 계기였던 셈인데 원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거나 따로 노력하는 게 있었던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소질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신문기자로 일하던 친구가 '386칼럼'이라는 코너를 만들고 제가 필진으로 참여한 게 첫 시작이었습니다. 2000년 당시 지방의원들 해외연수 문제가 도마에 올랐는데 이런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Q. 보령신문에서 그럼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인천일보까지 온 건가요.

"기자는 제가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른이 넘어 늦깎이로 신문사에 입사한 지 3년 만에 17대 총선을 맞았는데,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쪽에서 경선 관리를 맡아달라고 해서 잠시 신문사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까지 치렀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지구당 당직을 그만두고 인터넷신문인 '디트뉴스'에 입사해 다시 기자로 일하게 됐죠. 2009년에는 제가 처음 기자로 일했던 보령신문 경영이 어려워져 복귀해서 편집국장에 발행인까지 맡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행히 정상화되긴 했으나 안정적 경영을 위해서는 전문 경영인 필요했습니다. 2012년 보령신문을 떠나, 당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와 함께 수원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인천일보에 입사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Q. 꽤 파란만장한 기자 생활이었는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습니까? 다른 일을 해본 적은요?

"보령신문에 전문 경영인을 모셔오고 신문사를 인수인계하는 과정이 3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신문사 대주주였던 분이 운영하는 돼지농장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데, 제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경험이 수원으로 온 후에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특별한 사명감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기자

Q. 인천일보에서는 주로 어떤 분야에서 일했나요. 지금은 정치부 국회 출입 기자인데.

"인천일보 전에 수원일보에서 잠깐 근무했습니다. 인천일보는 2014년에 입사했는데 사회부에서 법조, 지방경찰청 등을 출입했고, 이어서 정치부에서 경기도청을 출입했습니다. 그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조기 대선이 실시되면서 국회에 출입하게 됐고, 대선 후에는 청와대 출입까지 맡게 됐습니다."

Q. 기자 생활을 하며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이 있다면? 자랑할 만한, 기억에 남는 기사도 좋구요.

"디트뉴스에서 충남 서해안지역 6개 시·군을 담당했는데, 2007년 12월 태안에서 사상 최악의 유류 유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한 달 넘게 피해복구 현장을 지켜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시커먼 기름이 뒤덮인 해변이 한 달여 만에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기사는 '충남 서해안에 UFO 미스터리 서클 소동'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7년 4년여간의 공백을 깨고 가수 서태지가 '모아이'라는 곡으로 컴백을 준비하던 중 서울과 충남 보령 등에서 'UFO 마케팅'을 시도했거든요. 근데 제가 천수만 인근에서 '미스터리 서클'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단독 기사를 내보냈는데 신문사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습니다. 이 기사 때문에 서태지 측은 추가 이벤트를 포기하고 미스터리 서클이 '모아이' 앨범 마케팅을 위한 자신들의 소행(?)임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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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진행된 판문점 프레스투어에서 북측 통일각을 배경으로. / 이상우 씨 제공

Q. 기자로서 직업 철학, 원칙,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게 혹 있습니까.

"특별한 사명감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기자가 되려고 합니다. 중용 23편에 나오는 말처럼 '작은 일도 무시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마침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선입견 없이 듣기, 맞춤법에 맞게 글쓰기, 한 걸음 더 현장에 다가가기 등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기사를 읽을 독자를 항상 먼저 생각하려고 합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에서 시골 라디오방송 DJ를 맡게 된 왕년의 인기가수 최곤이 '라디오를 들을 때는 DJ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DJ가 되고 보니까 라디오를 듣고 있을 청취자들의 모습이 참 궁금하다'고 하는데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고향, 양산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아내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 장군으로 만든 평강공주처럼 제가 주저앉으려고 할 때마다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존재입니다. 거의 표현은 못 하지만 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딸도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해줬는데도 잘 자라줘 기특합니다."

Q. 경남 쪽에는 평소 갈 일이 있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창원에 친척이 살고 있고 신학대학 동기생들이 경남 남해를 비롯해 곳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늘 마음으로 그리워합니다. 양산에는 조만간 가보려구요. 너무 달라져서 예전 살던 집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태어난 동네를 커서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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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여름 통영에서 아내 정주현 씨와 함께. / 이상우 씨 제공

Q. 일 외에 특별한 취미나 공부하시는 분야 등이 있습니까.

"몇 년 전부터 소설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대학원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습작 수준이지만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인물들을 발굴해 독자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요즘은 조선시대 단종의 누이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앞으로 삶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아직 한 번도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이번 여름 휴가는 꼭 해외로 갈 생각입니다. 이미 많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 제 자신이 너무 닫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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