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음력 6월 19일. 불볕더위가 정점을 찍던 오후 2시. 온 동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우리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들일까? 이번에도 딸일까? 딸만 줄줄이 6명을 둔 우리 집에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서다. '설마, 또 딸은 아니겠지?' 하지만 언제나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 7번째 태어난 아이의 성별도 '女'였다. 태몽도, 산모의 배 모양도 영락없는 아들이었기에, 사내아이를 기대했던 모든 이들에게 격한 안타까움을 안기며 태어난 계집애. 바로 나다. 물 건너 그리스 아테네에서 48도라는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1977년 그해 여름, 우리 집에는 시베리아 한파보다 더 차가운 한파 경보가 발효됐다. 그 누구도 "잘 태어났어!"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얼어붙은 분위기. 응애~ 하는 내 울음소리에 맞춰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 엄마의 처지에 눈물을 훔쳤고, 동네 아저씨들은 내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설상가상. 그 누구도 닮지 않은 퉁퉁하고 못생긴 갓난아기의 외모에 동네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더 커졌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쑥쑥 자랐다. 남들 앞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기며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나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 기억 속에 엄마는 거의 없다. 아버지의 존재만 있을 뿐이다. 밤마다 토닥토닥 안아서 잠을 재운 것도, 생선 가시를 발라 준 것도, 목말을 태워준 것도,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해준 것도, 모두 아버지였다. 족보를 가르치고 묘사를 데리고 다니며 아들처럼 자라기를 바란 것도 아버지였다. 특히, 아버지는 무언가를 할 때마다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셨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발톱을 깎아주실 때면 늘 "우리 봉임이는 엄지발톱이 두꺼워서 부자로 살 것이다", 머리를 깎아주실 때면 "우리 봉임이는 눈썹이 짙어서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태몽이 좋아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셨고, 머리가 영리해서 잘 살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뭔가 특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자신감 혹은 '똘끼'의 근원은 나의 아버지다.

내 이름 김·봉·임. 아버지가 직접 철학관에서 지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딸 이름을, 그것도 첫째도 둘째도 아닌 일곱째 딸 이름을 철학관에서 짓는 사례가 흔치 않았는데, 아버지는 내 이름을 철학관에서 지으셨다. 그렇다고 내 이름이 완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77년생 중에 '봉' 자가 들어간 이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봉' 자가 들어간 이름은 50,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등장하거나 현실에서는 할머니들 이름이 많다. 뭔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름 김·봉·임.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나라의 녹을 먹을 사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내 이름을 봉임이라고 지었다고 하셨다. 그날, 나는 마음속으로 큰 그림을 그렸다. '커서 대통령이 꼭 되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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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30년, 지금까지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보다 잊고 산 날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요즘, 부쩍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특히, 오늘 42번째 맞이하는 생일에는 더욱 더 아버지가 그립다. 비록,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짧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유산은 크다. 자신감, 끈기, 용기…. 남보다 나에게 조금 더 나은 장점이 있다면 그 8할은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것이다. 특히, 힘든 상황에 처할 때면 주문처럼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한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행운아다! 아버지의 말을 믿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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