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자의 뒷모습은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뒷모습은 부도덕의 상징이며, 얼굴 없는 자의 음흉과 죄악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찬 공주의 얼굴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권력과 그녀 앞에 줄지어 선 얼굴 없는 자들의 뒷모습에 공주는 고개를 떨굽니다. 공주의 뒷모습은 모순된 현실을 칼로 도려내 보여주는 모티브입니다. 위안을 위해 엄마를 찾아 나설 때나, 모질게 자신에게 서명을 강요하는 아빠를 만날 때, 그리고 마지막 여정을 걷는 그 순간도 카메라는 공주의 뒤에서 그녀를 비춥니다. 그렇게 그녀는 죄지은 것 없이 얼굴을 드러내어 세상을 활보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거리는 비정하며, 권력은 죄 없는 어린 뒷모습에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모순된 뒷모습을 통해 공주는 동화되지 못하는 타자가 되어, 관객에게 일종의 무력감을 심어줍니다. 관객은 공주의 고통을 느낄지언정 공주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파인더 속의 그 길은 황량하고 가혹해서 환상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관객과 동화되지 못하는 공주의 이야기는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잔혹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타인의 상처보다는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데 우선인 우리의 잔혹한 본성은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자가 되어 얼굴 없는 타인으로 거리를 배회하게 방관합니다.

생채기가 난 타인에게 공주가 연고를 발라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따돌림과 폭력으로 얼굴을 상해 온 친구의 얼굴에 살며시 연고를 바르고, 당당하게 부도덕한 불륜을 저지르고 누워있는 선생님 어머니의 목덜미를 치유합니다. 물리적인 상처에 공주의 연고는 아무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상처받은 존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찬찬히 상처를 바라봐주는 그 온순한 배려가 공주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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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드는 교실에서 아주 천천히 기타를 연주하는 공주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노랫말의 음절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공간을 채웁니다. 여린 손가락이 현을 누르고, 현을 튕길 때마다 그녀가 얼굴을 들고 손을 내밀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짐승들에게 유린당하던 그 비명소리가 더 깊이 내 마음속에 각인되는 건 아직 이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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