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약제부에서 일하며 사격 메달 노리는 투잡 선수

이달 말 창원에서 한바탕 잔치가 열린다.

사격 선수에게는 올림픽과 버금가는 꿈의 무대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창원 여름·가을을 수놓는다.

8월 31일 선수단 공식 입구 이후 9월 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치러지는 대회는 9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이번에 52회째를 맞이한 국제사격연맹(ISSF) 세계사격선수권대회는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5대 메이저 스포츠 이벤트다. 아시아 도시 개최는 1978년 서울에 이어 창원이 두 번째다.

올해 대회는 120개국, 선수단 4000여 명이 참가해 4개 종목(권총·소총·산탄총·러닝타깃), 60개 세부종목에서 자웅을 겨룬다. 10m 공기권총 등 14개 종목에 출전할 북한 선수단 22명(선수 12명, 임원 10명)도 등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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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채 사격 선수. / 박일호 기자

그동안 대회 준비도 차질없이 이뤄졌다. 2016년 3월부터 사업비 336억 원을 들여 주요 경기장을 증축·신축했다. 공사 결과 총면적 14만 7088㎡에 △10m 99사대 △10m 결선 10사대 △25m 70사대 △25m 결선 15사대 △50m 80사대 △50m 결선 10사대 △10m 러닝타깃(RT) 5사대 △50m RT 2사대 △클레이 경기장 6면 등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4월 창원월드컵사격대회로 점검도 꼼꼼히 마쳤다.

창원시는 이번 대회를 각국 선수와 시민 관람객이 어울리는 축제 한마당으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대회 기간 사격장 본관 앞 광장에서 문화 공연·행사도 그 한 예다.

대회에는 국제적인 사격 스타와 화제의 선수도 줄줄이 나선다. 올림픽 3연패에 빛나는 사격 황제 진종오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왕자' 사이드 알 막툼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창원시청 소속 스키트 김민지, 트랩 엄지원, 소총 송수주도 경남과 한국을 대표해 방아쇠를 당길 예정이다.

그리고 이 사람. 특이한 경력(?)으로 따진다는 이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 세 번 넘어져도 네 번 일어선 총잡이, 병원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남자. 사격에서 목표를 찾고,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삶의 쾌감을 얻는다는 그를 만났다.

종목 퇴출의 아픔

"세계사격선수권대회요?"

거침없이 인터뷰를 진행하던 그는 이 질문을 받자 멈칫했다. '120개국 4000여 명이 참여하는 세계대회'라는 중압감이 컸을까. 시선을 하늘로 하고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나서야 그는 입을 뗐다.

"그동안 사격은 제게 명중 이상의 쾌감을 안겼어요. 한 발 한 발 신중히 쏘고 나면 성과를 얻는 게, 더디지만 목표를 이뤄간 지난날 제 삶과 닮았었죠. 이번 대회는 20년 동안 이어온 사격 인생의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해요. 다른 한편으론 그동안 정말 잘 버텨왔다며 하늘이 준 선물 같기도 하고요. 살면서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요. 모든 걸 쏟아부을 거에요."

30일 앞으로 다가온 2018창원세계사격선수권대회 '러닝타겟 50m 혼합' 종목에 출전하는 정원채(35) 선수는 이 무대에 서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스스로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국내 선수 중 투잡(Two Jobs)인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 현재 원채 씨는 창원경상대학교병원 약제부에서 일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병원에서 일하는 원채 씨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격에만 매진할 수 있는 선수였다.

"사격은 중학교 때 시작했어요. 공기소총 종목으로 입문했다가 고3 때 러닝타겟으로 바꿨고요. 사실 이즈음 성적이 안 나와서 사격을 그만둘지 갈림길에 서기도 했어요. 그때 종목을 전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고 고민 끝에 러닝타겟으로 다시 시작했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고교 마지막 시절부터 대학교(경남대)에 진학하고 군 제대를 할 때까지, 크고 작은 대회에서 우승도 많이 했어요. 좋은 성적 덕에 전역하자마자 창원시청 실업팀에 들어가는 행운도 누렸고, 시청을 나온 뒤에는 경남도체육회 지원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죠. 그러다 2011년 러닝타겟 종목이 전국체전에서 퇴출당하는 일이 생겼어요. 자연히 체육회도 러닝타겟 선수들을 더는 안고 갈 수 없게 됐고요. 방황이 시작된 셈이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원채 씨는 한국폴리텍대학 입학을 택했다. 전자전기 기술을 배워 새 삶을 꾸리겠다는 각오였다. 그렇게 원채 씨에게서 사격은 영영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평생 이어온 인연의 끈을 단번에 끊을 순 없었다.

"함께 대회를 치렀던 동료가 러닝타겟을 다시 살려보겠다며 애쓰는 걸 봤어요. 사비를 들여 대회를 나가고 시범 종목일 지라도 사격장에 서는 걸 마다치 않았죠. 많이 반성했어요. 그리고 다시 총을 잡았죠."

이렇다 할 수입이 없었던 원채 씨는 모아 뒀던 돈을 써가며 연습을 하고 대회를 치렀다.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난 뒤에는 보험까지 해지했다. 창원 내 한 기업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원채 씨의 투잡 생활은 계속됐다. '종목 살리기'에 매진한 지 3년쯤 되었을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새로운 도약

"2015년 전국체전에서 러닝타겟이 부활했어요. 그즈음 개인적으론 두 개 실업팀에서 입단 제의도 있었고요. 고민 끝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격에만 매달렸어요. 훈련량을 늘린 결과 96회 전국체전 러닝타겟 10m 부문에서 3위에 오르는 성적도 거뒀죠. 하지만 기대했던 실업팀 입단은 무산됐어요. 이유는 몰라요. 졸지에 백수가 된 것이죠."

다시 반복이었다. 먹고살 길을 찾아 취업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마냥 좌절만 있진 않았다. 전국체전 정식 종목으로 부활하면서 경남도체육회 지원이 재개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원경상대병원에서 일할 기회도 잡았다.

"투잡 생활의 부활이었죠. 병원에 입사한 후 약 2년 동안 많게는 한 해 7개 대회에 나섰어요. 마땅한 훈련 장소도 시간도 없다 보니 퇴근 후 모교를 찾아 기초 자세 훈련만 반복하곤 했어요.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인천으로 차를 몰아 대회에 나서기도 했죠. 전국체전은 휴가를 써서 참가했고요. 뭘 그렇게 애를 쓰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저를 믿고 지원을 이어준 도체육회나 박형빈 병원장님, 곽은정 부장님 등 병원 측 배려에 꼭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전국체전 러닝타겟 10m 일반부에서 1위에 오르며 마음의 빚을 조금 갚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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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채 사격 선수. / 박일호 기자

승운의 기운은 올해에도 이어졌다. 원채 씨는 러닝타겟 50m 정상·혼합 세 차례의 선발전에서 좋은 기록을 거두며 창원세계사격선수권대회 출전 자격을 따냈다.

사격 선수라면 한 번쯤 서보고 싶은 '꿈의 무대'에 나서게 됐지만 원채 씨 목표는 개인보다는 팀을 향해 있다.

"팀에 도움이 되는 경기를 펼치고 싶어요. 개인 입상보다는 단체전 우승을 위해서 말이죠. 저만 잘 맞추면 충분히 입상권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잖아요. 후회 없는 경기로,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죠."

그러면서 원채 씨는 도내 사격을 향한 애정 어린 쓴소리도 마다치 않았다.

"역시 필요한 건 연계육성이에요. 쉽진 않겠지만 어려서부터 사격에 매진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원해야죠."

그렇다면 원채 씨가 사격을 하면서 얻은 혹은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원채 씨는 곧 '집중력' 이야기를 꺼냈다.

"사격 선수하면 집중력 이야길 많이 하잖아요. 20년 넘게 사격을 해오며 순간 집중력이 정말 높아진 듯해요. 표적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길 때 나오던 그 집중력이 어느 순간 일반 생활에서 발휘되는 걸 느껴요."

원채 씨 은사 중 한 명인 한희성 경남대 사격팀 감독은 그를 '정말 성실한 선수이자 나무라 할 때 없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 성실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원채 씨가 또 어떤 목표를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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