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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열전]진주시 망경동 김덕남 엄니

"인자 쉬엄쉬엄 살아야제. 깨시리 할 이유 없어"
10살 많은 노총각과 결혼해
식구 11명 여수서 시집살이
굴까기·재첩잡기·밥장사…
"평생 자식들보고 살았제"

2018년 10월 01일(월)
시민기자 권영란 webmaster@idomin.com

"혼인신고를 하러 갔더마는 내가 나이가 적다꼬 안해주더랑께. 좀 더 나이 차거든 오라는거라. 암만 내 나이가 열여덟이라꼬 그리 말해싸도 소용없어. 호적 나이가 열다섯이었으니께. 그래가꼬 허는 수 없이 시집가서 몇 년 되가꼬 혼인신고 했다아이요. 사람들이 울 신랑보고 도둑이라캤어. 10살이나 많은 노총각이 얼라같은 각시 데꼬 간다고."

김덕남 엄니. 어린 손자손녀가 8명이나 되지만 할매라고 부르기엔 아직 젊다. 아직 노령연금을 받을 나이가 아니다. 1954년생으로 65세이다. 거기에다 호적 나이는 62세이다.

"울 아배가 이장헌티 얘기했는데 이장이 까무가지고 제때 안 올라간기라. 옛날에는 태어나서 죽는 아아들이 많아 한참 있다 호적에 올리기도 해서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제."

▲ 결혼하고 아이낳은 후 하동읍 고 향사진관에 가서 찍은 결혼사진이다.

고향은 하동군 고전면 신월리이다. 하동띠기이다.

열아홉 시집살이는 날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이라…

"내가 이래 짱짱해비도 내 나이보다 훨씬 마이 살았제. 우리 영감이 일흔다섯인데 영감이랑 그리 살다보니 머시 더 옛날이랑께."

시집이 여수라 거기서 시집살이를 해서인지 경상도 전라도 말투가 뒤섞여 있다. 덕남 엄니는 시집가기 전에는 7남매 맏딸로 어머니 따라다니며 밭일 하고 살림하고 동생들 챙기는 게 일이었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던 시절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은 차곡차곡 밀려 있었다.

신월리 마을에 석회 공장이 있었다. 덕남 엄니의 아버지는 거기서 일하던 나이 많은 총각을 짝으로 찍어놓고 덕남 엄니와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 이모하고 짝 맺어줄라 캤다더만. 근데 총각이 인물 좋고 마음씨가 너무 좋더래. 동네 처니들이 거 공장을 맨날 기웃거리고…. 그래가꼬 총각이 탐나서 울 이모 안 주고 내한테 줘삤던거제."

그렇게 해서 당시 28살 노총각 한의 씨한테 시집을 갔다.

▲ 진주시 망경동 김덕남 아구찜 을 운하는 김덕남 엄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집이 바닷가라 반지락, 국, 홍합, 명태, 갈치… 괴기가 포식이대. 묵는 게 넘쳐. 우짜든지 나락이 귀해. 매에 보리밥이고 고구마야. 팥죽 마이 끼리무꼬 옥수수죽 마이 끼리무꼬."

시집은 여수 돌산도 향일암 근처였다. 식구가 전부 11명이나 됐다. 시동생이 일곱이나 됐는데 막내 시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작은 집에 식구들은 많고 일은 일대로 많았다. 시집은 굴 양식업을 했다.

"아이고, 잘사는 줄 았았더만 아나콩콩. 쌔빠지게 쪼시개로 굴 까고 시금치 팔아봤자 죄다 시아버지가 가져갔삐고 집에 돈이 없더랑께. 식구는 많고 묵을 끼 없어가꼬, 맨날 아침마다 보리쌀 빻아 밥을 하는데 쌀 섯낱은 시어른들 드리고 시동생들이랑 우리는 보리밥 먹는기제."

이제 열여덟, 아홉 살 되는 어린 각시에게 식구가 열하나 되는 시집살이는 고되고 힘들었다. 이른 아침 눈 뜨면서부터 잘 때까지 편히 쉬는 틈이 없었다. 밤이면 지쳐서 밭에서 일하던 옷 그대로 입고 쓰러지듯 잤다. 굴 까는 일을 온종일 하거나 끼니마다 20명이 넘는 굴 까는 인부들 밥을 해야 했다.

"요새 신혼들처럼 예삔 옷 입고 머시 신랑 기다릴 새도 없었더랑께. 사는 게 믄지…. 그때 그리 일을 마이 해쌌고 밥을 마이 해댔으니 나중에 식당 일은 암것도 아니었지. 아이구 지금 생각하몬 내가 노예였다, 노예…."

달랑 1만 원 들고 온 가족이 친정으로 들어가다

6년 시집살이 끝에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시댁에서 나왔다. 솥단지 하나 없이 수중에는 겨우 1만 원 있었다. 여수 돌산에서 하동군 고전면 가는 길은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돌산에서 여수 시내까지 배를 타고 가서 다시 하동 노량으로 가는 배를 타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네 식구 2번의 뱃삯을 제하고, 아이들 신발 한 켤레씩 사 신기니 정작 노량에서 친정까지 가는 차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네 식구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친정 엄니한테 차비를 좀 가져나오라고 사정했다.

덕남 엄니 스물다섯, 그렇게 친정살이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친정 엄니를 따라 밭일을 하고, 봄가을이면 재첩을 잡으러 다녔다.

"재첩 갖고 목돈 만들었제. 그거이 있어 묵고 살 수 있었다니까네. 처음에는 30키로 2000원 하던 기 나중에는 3만 원, 5만 원하데. 한 사람이 하루에 20만 원 30만 원은 벌었다아이가. 일본 수출하는 기 많아 장사들이 서로 가져갈라하고 낙동강에다 재첩씨 뿌린다고 쪼깨는 거는 거서 사가고 굵은 거는 요리조리 채 쳐서 시판하고…. 그때 돈을 참 벌었제. 그래도 마이 벌어도 나가는 기 많아. 요새 사람들은 그리 못 모아."

배를 한 척 장만한 뒤에는 더 많은 재첩을 잡으러 다녔다. 양식으로 키우기도 했다. 당시 양식이라는 게 인공적으로 억지로 키운다는 게 아니라 사시사철 강에서 그리 재첩잡이를 하니 구역이 저절로 생기고 덕남 엄니네도 자연스레 재첩밭이 생겨 관리를 하게 됐다는 말이다. 재첩은 일이 많았다. 삶고 다 일구고 물 위로 뜨는 알들을 모아 다시 냉장 또는 냉동으로 보관 장만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벌이가 좋았다. 목돈이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 중에 몇은 덕남 엄니네 재첩밭을 뺏으려고 온갖 험담을 하며 달려들었다.

"아이구, 돈이 되니까 다들 아귀처럼 달려드는데…. 사람이 무섭나. 돈이 무섭지."

1992년 덕남 엄니는 하동 살림을 다 정리하고 남편과 함께 진주로 나왔다. 그때 새로 산 집은 1층 가게가 딸린 마당 깊은 집이었다. 본격적으로 식당을 열어 재첩국 장사를 했다. '섬진강 재첩국'이라 해서 밥도 팔고 재첩을 삶아서 팔았다. 재첩은 대부분 부산에 있는 동생한테 보내 전부 팔게 했다. 근처에 병원들이 많아 동이에 가져가서 환자들에게도 팔았다. 그후로도 덕남 엄니 진주살이는 밥장사 26년 세월이었다. 장사를 쉰 적은 없다. 촌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맛있게 해준다고 입소문이 나 제법 장사도 잘 됐다. 그렇게 돈 벌어 3녀1남, 아들딸들 시집장가 보내고 10년 전에는 헌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평생 자식들보고 살았지만 이젠 쉬엄쉬엄 살아

"결혼사진은 아 놓고 몇 년 지나 고향사진관 가서 찍었제. 갓 시집갔을 때는 시아배가 반짝이 스웨터 하나 사주데. 복실복실 털이 참 예삔기라. 아배가 가자 여수 시내 가자해서 그때 사진 찍은기라. 머리 두 갈래 따가꼬."

덕남 엄니가 내놓는 흑백사진 속 새 각시는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큰애기 같다. 아이 낳고 사진관에서 찍은 결혼사진에 덕남 엄니는 웨딩드레스를 곱게 입고 어색하게 서 있다.

"인자 우리는 나이들어삐고 하루라도 메카넣어가몬서 사는 기지 뭐시. 쉬엄쉬엄 살아야제. 깨시리 할 이유가 없다. 내도록 쪼시랑쪼시랑 애달았제. 영감은 자꾸 하동에만 댕기는데 얄구지 밭뙈기 가꾸는 일야. 돈은 절대 안 벌어온당께. 그라몬 동업헌다고 돈도 안 떼였으낀데.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는기라. 요새는 그래도 거들어주는 기라."

덕남 엄니는 6년 전부터 식당 메뉴를 바꿔 '김덕남 아구찜'을 하고 있다. 물론 진주살이를 시작한 남강변 망경동 그 자리다. 열아홉, 스물 시집살이 때부터 수십 명 밥을 해대던 손은 지금도 빠른 데다가 거침이 없다.

"도망? 어딜 갈끼고. 힘들어도 내는 오로지 새끼들뿐인데. 특별나게 배운 거는 없어도 초등학교 나와가꼬 참말, 평생을 인간적으로는 나답게 산 기제."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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