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역할 넘어 도시 이해하는 매개체
창원 야구장 지역의 성지로 남길 바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크로크파크라는 경기장이 있다. 8만 5000명이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이 경기장은 놀랍게도 갤릭 스포츠라는, 아일랜드 전통 스포츠 전용 경기장이다. 그 나라 사람들도 축구와 럭비를 다른 유럽인 못지않게 좋아하지만, 크로크파크에선 오로지 손발 다 쓰는 갤릭풋볼과 주걱 같은 스틱을 들고 달리는 헐링이란 경기만 벌어진다.

아일랜드인 아니면 모르는 이 희한한 경기를 보러 수만 명이 매번 이 큰 경기장을 찾는다. 결승전이라도 열리면 경기장 주변 교통이 통제되고 버스 노선도 조정될 정도다. 우리로 치면 한국인만 아는 씨름 결승전을 보려고 상암 월드컵경기장이 꽉 차는 경우를 상상하면 될 것 같다.

경기장 정문에 서 있는 동상의 인물 마이클 쿠삭은 19세기 말 민족중흥운동의 목적으로 갤릭 스포츠를 조직화한 인물이다. 그의 헌신으로 아일랜드 방방곡곡에 생겨난 갤릭스포츠 클럽은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풀뿌리 조직으로 성장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갤릭스포츠를 핑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또 자신을 계몽했다.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20년 11월 21일 일요일 새벽.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더블린 전역에서 일제히 요인 암살 작전을 펼쳤다. 영국 경찰과 해병대 간부 상당수가 그날 피살됐다. 분노한 영국군은 그날 오후 장갑차를 앞세워 갤릭풋볼 경기가 한창이던 크로크파크에 난입해 선수들과 관중들을 겨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수십 명이 피살된 이날을 아일랜드인들은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다.

영국에서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인은 이 경기장을 지속해서 증·개축해 1991년 지금의 규모로 만들었다. 덩치만 키운 건 아니다. 경기장 정문에 서 있는 쿠삭 동상을 지나면 바로 박물관이 나온다. 그곳에는 피의 일요일 당시 선수들이 입었던 피 묻은 유니폼을 비롯해 전국 카운티별 클럽의 역사와 현재 유니폼, 역대 우승팀과 MVP 선수, 그리고 레전드들의 기록들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투어가 있다. 크로크파크는 단순 경기장이 아니라 아일랜드인들에게 '민족의 성지' 같은 곳이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종목의 경기장은 어떨까? 박지성이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나 류현진이 현재 뛰는 다저스 스타디움도 경기만 열리는 단순 경기장이 아니다. 그 팀의 유구한 역사와 영웅 같은 선수들을 기리는 박물관은 기본이고, 그 기억을 붙잡기 위한 다양한 기념물들이 깨알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올드 트래퍼드엔 세 개의 동상이 유명하다. 맨유를 처음 우승시킨 매트 버스비 감독의 동상, '버스비의 아이들'로 맨유에 영국 최초의 UEFA컵을 안긴 보비 찰튼,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의 동상, 그리고 '버스비의 재림'이라 불리며 맨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 동상들이다. 이 세 동상을 이해하면 맨유의 역사를 이해했다고 봐도 된다. 경기장은 도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시민들은 그곳에서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지난 7일 NC다이노스가 마산야구장에서 마지막 경기를 가졌다. NC는 내년 시즌부터 마산구장 옆에 세워지는 새 야구장에 둥지를 튼다. 이 시점에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창원시민에게 경기장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새로운 경기장의 색깔을 만들고, 남겨진 경기장의 활용방안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우리 경기장이 시민들의 기억을 기념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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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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