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시민에게 넉넉한 댐 같은 곳이었으면 한다

창원시 마산합포도서관에서 만난 이영화(49) 계장은 활동적이고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26년째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사서다. 시민이 지식 정보를 효율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언제든 공간을 내어 줄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이 계장은 늘 무언가를 구상한다고 했다. 크게 생각하다 보면 작은 거라도 되지 않냐며 웃는 그가 인상 깊었다. 사서로 일해 온 지난 시간과 합포도서관, 그리고 앞으로 이뤄 보고픈 일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기자라는 꿈, 사서 공무원으로 일할 기회

이영화 계장은 여섯 살 때 기억을 들려주었다. 당시 살던 진해(창원시 진해구) 동네에 자주 놀러 다니던 놀이터가 있었다. 그 놀이터가 어느 날 없어졌다. 무척 서운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곧 그 자리에 도서관이 들어섰다. 1975년에 개관한 진해중앙도서관이었다. 그 뒤로는 한동안 도서관이 곧 놀이터였다.

"그때 5원을 주고 도서관에 들어갔었어요. 당시에는 유료였거든요. 도서관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보는 잡지가 쫙 꽂혀있었는데 그 책장은 유리문으로 다 잠겨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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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화 마산합포도서관 사서담당주사. / 서정인 기자

관리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어린이 잡지를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무렵에 계몽사 이런 데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이 상당히 유행했어요. <왕자와 거지>, <그리스 로마 신화> 이런 책이 50권씩 세트로 나오는 그런 전집이요. 제가 도서관 다니면서 책을 보기 시작하니까 아버지가 전집을 사서 들여놓으면서부터는 도서관에 발걸음을 끊었었죠. 그러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도서관 학습실에 주로 공부를 하러 갔어요."

장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던 진해여고 3학년 때였다. 8년 동안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이슈를 매일 접하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고3 때에는 친한 친구랑 둘이서 '우리는 종전기자가 되자', '어느 대학교 국문과에 가서 공부를 하자' 이런 꿈을 꿨었어요.(웃음) 그랬었는데 그 친구는 다른 대학에 가고 저는 덕성여대에 입학했죠. 그때 당시 두 번째 지망이었던 곳인 도서관학과를 갔어요."

그때 도서관학과라는 것이 상당히 생소했다. 도서관학과를 졸업하면 사서 자격증이 나왔지만 사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거나 사서가 되고 싶어 입학한 것은 아니었다. 기자라는 꿈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저희 둘째 오빠가 중앙일보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오빠가 조사자료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흥미가 생겨서 조사자료기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죠."

노력했지만 기회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서울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하게 된다.

"대학 4학년 때 언론사시험 다 떨어지고 너무 힘들어서 진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집에 왔는데 모 신문사 조사자료기자 서류전형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고 거기에다 사서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한 거예요."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까 조사자료기자 면접을 볼까, 아니면 사서 공무원을 할까, 고민을 했는데 주변에서 그래도 공무원 사회가 남녀 차별도 없고 안정적이니까 더 낫지 않겠냐고 했어요."

첫 발령지는 진해중앙도서관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이용한 도서관,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있는 그곳이었다.

"그때가 92년 8월이니까 23세부터 시작해서 지금 49세까지 이 일을 하고 있네요."

사서의 일

이 계장은 현재 마산합포도서관에서 사서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발령이 잦았던 편이라 창원시 내 여러 도서관을 골고루 거쳤다. 마산합포도서관에는 2002년 개관 업무를 맡아 온 후부터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 도서관 건물이 예전 합포구청 건물이었어요. 구청이 없어지고 2002년 2월에 도서관 개관을 했죠."

이 계장은 사서를 책이 시민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책을 정리하고 분류를 체계적으로 하는 것도 시스템이고 사람들이 도서관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시스템을 기획하는 것도 사서의 역할이에요. 책을 관리하는 업무 외에 더 많은 일을 사서들이 머리를 싸매며 하고 있어요.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가 사서라고 하면 잘 안 믿어요.(웃음) 도서관 사서라고 하면 다들 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떠올리잖아요. 물론 자료실에서 근무할 때는 말도 조용조용하게 하지만 저는 이용자들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편이고요."

도서관 이용객들과 친근하게 지내기 때문에 생긴 귀여운 에피소드도 있다.

"진해도서관 있을 때 결혼을 했어요. 음대에 다닌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제 결혼식 때 피아노 연주를 해주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저희 도서관 이용하는 한 꼬마가 저를 너무너무 많이 따랐었어요. 그 아이가 '선생님, 결혼식 웨딩마치 제가 그거 치면 안 돼요?' 하면서 연습하고 있다고(웃음) 하도 그래서 그 아이가 전공한 친구를 제치고 반주를 해줬죠.(웃음)"

주말에도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특성상 사서들은 주말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어야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 그 일정에 맞춰 일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겠다 싶었다. 그 와중에 대학원 공부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주말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 아쉬운 점은 있었죠. 특히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에는 근무를 바꾸거나, 가족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어요. 불편한 부분은 있지만 20년 넘게 그렇게 해오다 보니 괜찮아요. 갈수록 우리 사회가 개인의 행복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데 근무환경도 점차 거기에 맞춰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일하면서 부산대 대학원을 다녔어요. 졸업은 못 하고 수료만요. 일반대학원이라 일반 학생들하고 같이 공부를 했는데 저희 남편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하지 그랬냐고, 그러면 서울대 갔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이들이 8세, 9세 이 무렵이었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참 좋은 교육이지 않나 이런 생각도 했어요."

'태풍 매미'의 기억, 도서관 통합시스템 구축

도서관에서 일하며 겪은 일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이 계장은 제일 먼저 태풍 매미 때를 떠올렸다. 개관한 지 1년이 좀 넘은 시점인 2003년 9월, 태풍 매미는 마산 앞바다에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마산합포구 일대가 물에 잠겼고 도서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하에 주차장도 있고 보존서고도 있는 넓은 공간인데 지하와 1층이 모두 잠겨버렸었어요. 개관한 지 얼마 안 됐고 책을 3000만 원어치 정도를 사서 지하에 보관을 해뒀었는데요. 그 책들이 다 잠겨버린 거예요. 너무 안타까웠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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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합포도서관 외부 전경. / 서정인 기자

전 직원과 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필사의 도서관 살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물 빼는 데에만 2주가 걸렸다.

"우리 자원봉사자들, 또 인근에 자원봉사하러 다니시는 시립예술단에서도 도와주셔서 한 달 반 만에 다시 운영할 수 있었어요."

그 막막한 상황을 이겨낸 경험은 직원들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태풍 매미'는 건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재난인데 그걸 겪었기에 이제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그때 같이 고생한 직원들과 지금 15년째 모임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매미회'라는 이름으로요. 하하."

이 계장은 우리 지역 공공도서관 12군데, 작은도서관 62군데를 시스템으로 묶는 통합시스템을 구축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가장 뿌듯한 일이라고 했다.

"2015년 1월에 국비 5억, 시비 5억을 합쳐 10억을 가지고 공공도서관 12군데, 작은도서관 62군데 통합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고 들었어요. 도서관회원증 하나로 아무 도서관에서나 책을 빌릴 수 있고 아무 도서관에나 반납할 수 있게 한 거죠. 경남도에서 우리 지역만 국비지원을 받아서 했어요. 주위에서 우려도 걱정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큰 시스템을 운영하려면 지속적으로 예산이 들고 인력이 필요하니까요."

이 계장은 이 시스템이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예산부서와 인사부서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지금도 누가 기안하고 기획했는지 모르는 분이 '그 시스템 너무 편리하고 좋더라'라고 하거나 도서관 이용객들이 '이건 너무 잘한 일이다'라고 평을 해주시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죠.(웃음)"

백화점 문화센터 못지않은 마산합포도서관

마산합포도서관 곳곳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들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계장은 다양한 연령의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9월부터 하고 있는 '은빛영화관'도 그중 하나다. 평일 낮에 어르신들이 보기 좋은 영화를 2층 종합자료실에서 상영하고 있다.

"그전에는 주말에 어린이 중심으로 가족영화관을 했었어요. 그러다 평일 오후에 은빛영화관을 하니까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는 거예요. 열 분 정도 오시거나 더 많이 오시는 날도 많아요. 그걸 보면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르신들이 집 밖에 나와서 갈 곳이 있다는 게 의미가 크잖아요. 그런 곳이 도서관이 되었으면 하고요. 도서관 이용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저희 마산합포구는 노령인구가 창원시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곳이에요. 또 봉사활동하러 오는 청소년들이 시간만 때우는 게 아니라 와서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만들었어요. '노란 앞치마 책 읽어주기'라고, 청소년들이 주말에 와서 유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간단한 손 유희나 율동, 색종이 접기 이런 것도 같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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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캐릭터 열쇠고리 만들기. / 마산합포도서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열두 달 내내 다양한 문화강좌와 행사가 열린다. 거의 문화센터 수준이었다. 도서관 가까이 살지 않으면 손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직도 도서관을 공부방, 책을 빌리는 곳 개념으로만 생각하시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좋은 강좌나 이벤트도 많이 하고 앱이나 인터넷으로도 접근하기 쉽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참 듣기 좋았던 말이 있는데 도서관 이용하시는 분들이 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 기사가 나가는 11월은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달이다. 합포도서관에서는 그와 어울리는 체험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함께 즐기는 국화축제라는 주제로 국화 열쇠고리, 국화 케이크 만들기 같은 체험행사를 준비 중이에요. 또 국화축제장 다녀온 걸 인증하면 어린이자료실에서 랜덤으로 선물박스도 주고요. 시민들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을 느낄 수 있게 작은 특강들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우리 지역에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치렀잖아요. 합포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아마 '에이미(창원세계사격선수권대회 마스코트)'가 뭔지 확실히 알았을 거예요. 에이미 캐릭터 색칠하는 걸 아이들이 엄청 열심히 했었거든요. 4천 장 정도는 그렸나.(웃음) 그렇게 도서관에 와서 하나라도 즐길 수 있었으면 해요"

도서관 내 전통한실 느낌으로 꾸며진 아늑한 방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이 계장은 이 공간도 신청만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소모임, 토론회 등 다양한 용도로 빌려 이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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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합포도서관 안내게시판 /서정인 기자

사서, 공공도서관의 역할 이해하는 마음가짐 중요

공공도서관은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체육, 교육, 문화 시설 등과 함께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은 사회적 약자가 양질의 정보가 중요한 정보화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한다. 이 계장은 도서관이 수행하는 복지적인 역할 또한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사서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사서 볼 수 있잖아요. 약자들을 많이 생각했으면 해요. 정보가 곧 돈이 되는 사회가 정보화사회인데 고급 정보를 유료로 서비스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 살게 돼요. 그래서 그런 개념을 사서들이 인식하고 나눌 수 있는 자질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독서소외인을 위한 활동을 해요. 바로 옆 가고파 희망의 집에 계신 분들이 사회 적응 훈련을 하러 여기 오시기도 하고요. 어느 도서관에나 노숙자분들도 많이 오거든요. 갈 데 없는 분들이 마음 편하게 올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드는 일을 사서들이 열린 마음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계장은 도서관이 시민에게 댐과 같은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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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화 마산합포도서관 사서담당주사. / 서정인 기자

"댐에는 사람들이 관광도 하러 가고, 단풍놀이도 하러 가고, 낚시도 하러 가고 하잖아요. 거기다 댐이라는 본연의 기능도 하죠. 지식이 필요한 사람도 지혜가 필요한 사람도, 위안이 필요한 사람도 도서관에 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보를 담고 있고 언제든 열어 필요한 곳에 줄 수 있는 댐, 그런 역할을 정보화사회에서는 도서관이 했으면 좋겠어요."

이영화 계장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사서로서 지역사회를 바탕으로 그려보고 있는 꿈이 있다.

"저는 항상 목표를 잘 정해요.(웃음) 요즘 꿈꿔보고 있는 건… 일본에 다케오도서관이라는 곳이 있어요. 인구가 4~5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사가현 다케오라는 지역에 있는 다케오 시립 도서관 한해 방문객이 100만 명이래요. 그 도서관 견학을 갔다 왔었는데,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그런 도서관을 우리 지역에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요."

다케오도서관은 도서관이자 복합문화공간 같은 곳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볼 수 있다. 시민들이 찾기도 하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을 보러 와서 그 지역에서 관광을 하고 식사도 한다. 인구가 감소하는 소도시를 도서관이 살린 것이다.

"누구라도 꼭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하는 도서관을 언젠가는 우리 창원시에 만들어서 운영해보고 싶어요. 또 지금 생각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통일 시대를 대비해서(웃음) 요즘 북한 도서관법을 자주 보고 있거든요. 우리와 다른 점은 뭔지, 같은 점은 뭔지. 우리 도서관계도 통일을 대비해서 교류할 수 있는 방안들을 공부해두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물론 중앙이나 다른 데에서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지방화가 곧 세계화'라고도 하잖아요.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왔다고 하지 미국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요. 도시 간에 교류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어떤 걸 해 볼 수 있을까, 그런 상상도 해보고 있습니다. 너무 거창했나?(웃음) 꿈을 꾸다 보면 작은 거라도 뭔가 되더라고요. 꿈도 안 꾸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고요."

이영화 계장은 시민들 일상에 도서관을 안겨주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평온한 모습의 도서관, 그 안에서 고민과 도전을 하는 사람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도서관 풍경이 조금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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