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동백꽃처럼 선연히 떠난 '남기의 동백꽃' 닮은 '혁명 시인' 김남주는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나무 끝에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마음. 그 마음을 '조선의 마음'이라 노래하고 있다. 옛날엔 그랬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달린 감을 다 따지 않고 몇 개씩 남겨두었다. 늦가을에서 겨울 사이. 야생 새들이 먹이가 부족해질 무렵이면 까치뿐만 아니라 까마귀, 어치, 참새, 직박구리가 와서 감을 쪼아 먹었다. 그 새들을 위해 홍시 하나, 둘 남겨둘 줄 아는 마음.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가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빨간 열매가 달리는 감나무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나무 중 하나다. 감나무의 '감'은 담장 주변에 심어 가꾸던 '담'에서 유래되었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담'에 붙어 있는 나무가 바로 '감'나무였던 것이다. 찬 바람 불어오는 늦가을에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집 마당이나 담장 주변에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 볼 수 있다.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이 감동스러워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감에 대한 추억 떠올리며 옛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 스피커에서는 나훈아의 <홍시>란 노래가 구수하게 흘러나온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 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 세라 사랑땜에 울먹일 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감나무가 있는 옛 집 풍경.jpg
▲ 감나무가 있는 옛 집 풍경.

노래 들으며 잠시 어린 시절 감나무에 얽힌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그 시절 배고픈 아이들은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즉시 잽싸게 가방 던져놓고 들로 산으로 수렵·채집(?) 활동을 나간다. 감이 매달려 있는 곳 찾아 동네방네 몰려다닌다. 그럴 때 가장 인기 좋은 감나무는 단연코 단감나무였다. 또 단감나무가 있는 집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행여나 단감 한 개라도 얻어먹을 요량으로 학교 오갈 때 가방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집에서 키워 가꾼 단감나무였다.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란 얘기도 들렸다. 단감나무는 재래종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래종 단감나무는 단감이 열리긴 하는데 한 나무에 떫은 감도 같이 열렸다. 자칫 잘못 베어 물었다가 떫은 감을 씹어 낭패 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리가 내릴 무렵이 되면 모든 감이 단감으로 변했다. 그때까지 감나무 가지에 붙어있는 감이 있을 리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비탈과 밭 주변을 맴돌곤 했다.

우리 집에는 큰 대봉 감나무가 있었다. 그땐 '왕감'이라 불렀다. 감이 꽤 많이 열려서 주변 친척집과 이웃집에 나눠 주기도 했다. 대봉 감나무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홍시 따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른들에게 물으니 50살은 훨씬 넘었다고 했다. 그 감나무는 그 후로도 50년. 합쳐서 100년 정도 살다가 올해 생을 마감했다. 홍시 따는 데는 대나무 작대기가 제일 좋은 도구다. 기다란 작대기 끝을 칼이나 낫으로 살짝 쪼갠 후 나무 막대기를 찔러 넣어 고정 시키면 감 따는 도구로 변신한다. 처음엔 홍시만 골라 따먹다가 나중에 가서는 감나무에 달린 감 모두를 따서 창고에 저장했다. 겨울 내내 꺼내 먹는 재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장독대에 숨겨놓은 감을 엄마 몰래 찾아내다 장독을 깼던 일도 있었다. 어린 시절 다들 한두 번 정도는 겪었을 이야기다.

곶감 만드는 감나무.jpg
▲ 곶감 만드는 감나무.

감나무는 동아시아 온대 지방 특산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중국 중북부 지방, 일본 그리고 한국의 중부이남 지역에 널리 재배되고 있다. 북한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감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감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인 청동기 무렵부터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다. 감나무와 비슷하게 보이는 고욤나무와 돌감나무는 같은 속이면서 종은 다르다. 고욤나무는 등산로 초입이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는 산 중턱 같은 곳에서 자란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에 의해 씨앗이 옮겨져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고욤나무는 감나무보다 추위에 강하고 씨앗만 뿌려도 쑥쑥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감나무를 접붙일 때 대목으로 많이 이용한다. 예쁘고 앙증맞은 꽃이 나무 가득 피었다가 떨어져 내리는 모양이 특히 아름다운 나무다. 돌감나무는 고욤나무보다는 훨씬 더 감나무에 가깝다. 열매 크기도 고욤나무보다는 크고 감나무에 열리는 감보다는 작다. 둘 다 씨앗이 많아 먹기가 조금 불편하다. 단감이 귀했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 집도 단감나무를 가질 수 있다는 부푼 꿈 안고 단감나무 씨앗을 고이 모셔두었다가 심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단감나무 씨앗을 심었다고 그 나무에서 단감이 열리진 않는다는 사실. 돌감나무나 고욤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은 한참 후 나무가 자라 커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참으로 씁쓸한 심정이었다.

감은 크게 단감과 떫은 감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감에는 부유·차랑·어소·선사환 등이 있고, 떫은 감에는 단성시·고종시·사곡시·분시·원시·횡야 등이 있다. 재래종 감은 거의 대부분이 떫은 감이다. 단성시는 경상남도 산청이 원산지인데 곶감으로 이용되는 대표적인 감이라 할 수 있다. 사곡시는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이 원산지이고, 고종시는 경상북도 예천군이 원산지다. 단성시, 사곡시와 마찬가지로 곶감 만드는 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단감은 일본 원산인 부유·차랑 등이 대표적인 품종인데 둘 다 나무가 튼튼하고 과일이 납작하면서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단감 품종들이다.

고욤나무 열매.jpg
▲ 고욤나무 열매.

옛날 조선 시대에는 감나무를 7덕과 5절이 있는 나무라 하여 칭송해왔다고 한다. 7덕은 나무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으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이 있으며, 낙엽은 훌륭한 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다소 틀리거나 다른 부분도 있지만 감나무가 지닌 특징을 제법 잘 표현하고 있다. 5절은 잎이 넓어 잘 말리면 종이 대신 글씨 연습하기가 좋아 문(文)이 있고, 목재는 탄력 있고 단단하여 화살촉과 같은 무기의 재료가 되므로 무(武)가 있으며,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모두 똑같이 붉어 충(忠)이 있고, 홍시는 달고 부드러워 나이 드신 어른들이 치아 없이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므로 효(孝)가 있고, 늦가을까지 바람과 눈,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남아 나무에 매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하여 감나무를 칭송했다.

감나무 이야기는 '오성과 한음'에 등장하기도 한다. 오성의 집에 있는 맛있는 감이 옆집으로 넘어가 그 감을 옆집 하인들이 자꾸 따먹는 바람에 오성이 화가 나게 되었고, 오성이 옆집 방으로 팔을 뻗어 '이 팔은 당신 방에 있더라도 내 팔이오'라고 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다.

감나무에 얽힌 속설이나 민속들도 꽤나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얘기는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3년 내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는 속설이다.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얘기지만 일리 있는 부분도 있다. 감나무는 겉보기에 튼튼해 보이는 가지라도 함부로 올라가 밟으면 부러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나무에서 썩은 가지를 산가지로 오인해 잘못 밟았다가 떨어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감나무에서 떨어져 기절해본 기억은 있다. 이럴 때는 떨어지면 바보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나무가 되기도 한다.

단감이나 곶감은 요즘엔 돈만 주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정말 귀한 과일이었다. 제사 때 쓰고 난 곶감은 손주들만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떨어져 내리는 감을 줍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기도 했었다. 소금기 있는 물이 담긴 독 안에 감을 넣어 삭히면 맛있는 감으로 바뀌는 현상이 너무나 신기해 감이 달아지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도 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만 감을 차지할 수 있어 늦잠 자는 버릇 있는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엔 감꽃도 제법 맛있는 먹을거리였다. 감꽃 목걸이 만들어 동네 누나에게 선물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모두 아련한 옛 추억들이다.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옛이야기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옛날 조금 먼 옛날에 답답한 감장수가 있었지. 감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하는 일들마다 답답해서 사람들이 막 놀리곤 했는데. 글쎄 감을 팔러 나갈 때마다 그 많은 감 중에 반쯤 썩어가는 감을 골라서 내다 파는 거야. 제값도 못 받고 반값만 받으면서 계속 감을 내다 팔았다네. 답답해라. 답답해라. 답답한 감장수는 결국 가을부터 겨울까지 반쯤 썩은 감만 팔아서 손해만 본 거였어. "니는 마 늘푼수 없는 답답은 감장수 되모 안된데이", "우쨌든가네 싱싱하고 실한 감부터 내다 팔아야 되는 기라."

 

할머니는 답답한 감장수 이야기를 통해 사랑하는 손주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땐 다소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릎을 치게 하는 지혜 담긴 이야기가 되었다.

경남에는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감나무와 남사 예담촌 하씨 고가 뒤뜰의 감나무가 꽤나 유명하다. 백곡리 감나무는 2008년에 천연기념물 제492호로 지정된 감나무인데 450살 정도 된 나무 어르신이다. 올해는 감이 세 개가 열렸다. 감나무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아주 크고, 나무 모습도 아름답다. 하씨 고가 감나무는 630살쯤 되었는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란 분이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월의 무게가 나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때로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 영 '감'이 잡히지 않으신 분들은 시간 내서 이 두 감나무 어르신 만나 뵙고 감을 잡아 보는 것도 좋겠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