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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묘] (9) 쿠데타를 추억하다

입력 : 2019-01-02 11:32:55 수     노출 : 2019-01-02 11:37:00 수
나한거사(羅漢居士) webmaster@idomin.com

매년 10월과 12월은 1979년에 발생한 '정치적 대격변'을 곱씹게 만드는 계절이다. 대격변이란 5공화국 출범을 잉태한(?) 10·26 사건과, 5공 시작을 사방에 알린 12·12 군사반란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이런 격변을 꿈꾸거나 실행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극우 보수 세력이 공공연히 쿠데타를 거론하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는 현실은 종종 암울했던 그때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쿠데타란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을 말한다. 12·12 군사반란은 그 전형적인 예다. 쿠데타가 혁명과 다른 점은 혁명이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 쿠데타는 같은 지배계급 내에서 단순히 권력 획득만을 겨냥한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들여다보면 인류 역사는 쿠데타와 혁명이란 두 단어로 그 얼개를 설명할 수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수많은 쿠데타가 있었고, 때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엇갈렸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고, 사육신 정변과 갑신정변은 처참하게 실패한 사례다. 성공한 쿠데타는 이름도 반정(反正)으로 기록되지만, 실패한 쿠데타는 그냥 정변으로 남는다.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기에 쿠데타는 '음모', '비밀', '신속', '장악' 등과 같은 단어가 동원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할 경우 쿠데타는 무산되기 마련이다. 사육신 정변이 시기를 늦추다가 기밀 누설로 실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일이 일인 만큼 운도 따라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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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모습.

역사상 가장 성공한 쿠데타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써 내려간 쿠데타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에 답은 수십 가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위나라 말기에 벌어진 정변(政變)이 '으뜸 쿠데타' 중 하나라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때는 서기 239년. 위나라 연호로 경초(景初) 3년. 위나라 2대 황제 조예가 죽자 신예 조상(曹爽)과 노신(老臣) 사마의(司馬懿)가 8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황제를 공동으로 보필하게 된다. 조상은 위나라 공신 조진의 아들이다. 나이도 어리고 공도 없지만 집안 배경이 좋았기에 조씨 종친을 대표해 위나라 황실을 지키는 이로 선발됐다.

처음 두 사람은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교대로 숙위(宿衛·황제를 지키는 일)를 담당했다. 조상은 사마의가 명망이 높은 데다 나이가 많아 부친을 섬기듯이 대했다. 매번 대사가 있으면 사마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자신이 전행(專行·자기 마음대로 일을 결단하여 행함)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이 손에 익자 조상은 딴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하안, 이승, 등양, 정밀, 필궤-과 모의 끝에 사마의를 태부(太傅)라는 허울뿐인 벼슬로 올리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는 이렇게 기록한다.

조상이 하안, 등양, 정밀의 모책을 써서 태후를 영녕궁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횡했다. 형제가 함께 금병(禁兵 친위군)을 관장하고 친당(親黨·친한 무리들)을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선제(사마의)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과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 선제가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하, 등, 정이 경성을 어지럽히는구나"라고 노래했다.

사서란 승자의 기록이기에 100% 믿을 순 없지만, 조상이 그 무리들과 부귀영화에 몰두하면서 인망을 잃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사마의가 조상과 권력을 다투는 일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병을 핑계로 근신하자 조상은 한층 기세등등했다. 그런 한편 심복 이승으로 하여금 노회한 사마의를 정탐하도록 했다.

이 대목은 사서마다 글자 표현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뜻은 다 비슷하다. 다음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형주자사로 부임하게 된 이승이 인사차 들르자 사마의는 두 시비(侍婢·여자 시종)에게 자신을 부축하게 했다. 사마의는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질질 끌렸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켜 목마르다는 표시를 하자 시비가 죽을 올렸다. 사마의가 그릇을 손으로 잡지 못하고 입을 내밀어 마시는 모습을 보였는데 죽이 모두 흘러내려 앞가슴을 적시게 되었다. 이에 이승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위로하여 말했다.

"모두들 명공에게 구풍(舊風·지병인 중풍)이 도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찌 존체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자 사마의가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음이 눈앞에 있소. 군이 몸을 굽혀 병주로 가고자 하니 병주는 호인들과 가까이 있어 그들을 잘 막아야 할 것이오.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를 잘 부탁하오."

이승이 이 말을 정정하여 말했다. "저는 본주(本州·형주, 이승의 고향이라 본주라고 말한다)로 가려는 것이지 병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고의로 말을 잘못 알아들은 양 가장하여 말했다. "군이 정말 병주로 가려는 것이오?"

이승이 답답한 듯 다시 크게 말했다. "형주에 가는 것입니다."

사마의가 그제서야 제대로 알아들은 듯 말했다. "나이를 먹어 머리가 혼란스러워 그런지 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소. 지금 본주로 간다 하니 융성한 덕행과 장렬한 기개로 큰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승은 면담이 끝나자 곧 조상에게 전말을 고했다.

"사마공은 시체와 다름없이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습니다.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조상 등은 다시는 사마의를 방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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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의.

조상 일당을 완벽하게 속이는 사마의의 연기력이 놀랍지 아니한가?

조상이 권력을 쥔 지 10년째인 서기 249년, 가평(嘉平) 원년. 절치부심하던 사마의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다. 조상이 명제릉(明帝陵·2대 황제 조예의 무덤)을 참배하러 황제와 중신들을 데리고 성을 나서자, 사마의는 황태후의 영을 내세워 각 성문을 닫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무기고를 점령했다. 그런 한편 조상의 동생들이 거느리던 군영을 모두 점령하고 황제에게 조상의 죄를 열거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상주문의 내용은 섬뜩했다. 조상이 죽은 황제의 부탁을 어기고 국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참담하게도 군주의 의례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 군영을 훼손하고 금병과 백관의 요직에 측근들을 기용하여 도당의 뿌리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 환관들과 내통하여 장차 보위를 넘보고 있다는 것 등이다. 조상이 대역죄인임을 온 천하에 알리는 포고문과 다를 바 없다.

조상은 상주문이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시체나 다름없다던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이제 남은 일은 조상과 사마의가 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한동안 양 진영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는 애초부터 성사되지 않을 일이었다. 조상이 감히 그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상은 부모 잘 만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면서 큰 안방도령이었다. 일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일도 없고, 관직 생활을 하면서 고초를 당한 일도 없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모략가 사마의를 감내할 수 없었다.

양측이 대치하는 동안 사마의는 계속 승부수를 띄운다. 먼저 저명한 관리들을 보내 자수하여 죄를 인정하도록 촉구했다. 또 조상이 신임하던 사람을 보내 단지 관직에서 해임만 할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주장했다.

조상은 고민 끝에 항복하기로 한다. 측근들은 황제의 명을 내세워 지방에 주둔하던 군대를 불러 사마의를 토벌하자고 주장하나, 조상은 칼을 내던지며 이렇게 외친다. "관직과 작위를 버리면 나는 아직 부가옹(富家翁·돈 많은 노인)이 될 수 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대치는 이렇게 끝난다. 허망한(?) 결말이다. 조상이 만약 내전을 각오하고 승부에 임했다면 사마의가 권력을 확보하는 길은 의외로 힘들었을 것이다. 조상이 황제를 데리고 사마의를 반역자로 몰아붙였다면 승패가 호락호락 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사마의가 예상한 대로였다. 조상이 '노마연잔두(駑馬戀棧豆)'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계속 사람을 보내 "관직에서만 해임할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고 메시지를 던진다. 조상은 군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지만 성 안에는 온 가족과 애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만약 일전을 불사한다면 그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환범이란 사람이 조상에게 한 판 붙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권고하지만 조상에게는 천하보다 가족의 안위가 더 소중했다. 그랬기에 사마의가 던진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사마의는 쿠데타에 성공한지 12일 후 조상이 총애하던 환관 장당이 조상 일당과 짜고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상과 그 형제는 물론 그들을 따르던 하안, 등양, 이승, 정밀, 필궤, 환범 등을 모조리 죽이고 그 3족까지 멸한다. 한마디로 씨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이름깨나 얻고 있던 선비 숫자가 이 때문에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니 그 잔혹함을 짐작할 만하다.

이 쿠데타는 피 흘리는 내전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이상적인(?)' 쿠데타로 꼽힌다. 먼저 흐름을 분석해보자. 사마의는 처음 권력을 놓고 조상과 직접 다투기란 어렵다고 판단했다. 종친을 비롯한 조씨(夏侯氏 포함·하후씨는 조씨와 같은 일족) 세력을 대표하는 조상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자신이 되레 역적 혐의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따라서 태부 벼슬을 유지한 채 상황을 관망하는 쪽을 택한다. 조상이 정권을 오로지 하면서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쿠데타 명분은 하나둘 축적된다. 사마의는 이 와중에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만'전술을 구사한다. 병이 깊어졌다며 주변을 속이고 자신을 염탐하러 온 이승을 완벽하게 농락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성공이었다.

디데이는 조상이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는 때였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무기고를 점거하는 한편 황실 어른인 태후를 을러 '조상 토벌문'을 작성한다. 그런 후 나약한 조상을 제압하기 위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다면 '죽이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낸다.

원래 사마의는 탁월한 용병가였다. 적국인 촉한과 내통하는 맹달을 신속하게 잡아 죽이고, 요동에서 반기를 든 공손연을 단번에 제압한 군사적 공적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신헌영이란 여인이 한 말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동생 신창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를 묻자 신헌영은 "성공할 것이다. 조상의 재주로는 태부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신속하고도 과감한 전술 덕분에 따로 피를 흘리진 않았으나, 쿠데타가 성공한 후 사형장은 목 없는 시체들로 가득했다. 잔인한 사마의는 조상과 깊이 연결된 이들을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었기에 이 쿠데타는 수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장제라는 이는 쿠데타군 사자로 조상에게 가서 '병권만 내놓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사마의가 조상을 유인하려고 그렇게 시킨 때문이긴 하지만 장제는 실제로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진심 어린 어조로 조상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한 멸족이었다. 장제는 자신의 말이 신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려 죽었다.

조상의 심복인 하안과 등양은 일찍이 신묘한 점술가 관로를 찾아가 미래를 물었다. 관로는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을 낮추고 널리 은혜를 베풀 것을 권한다. 그들이 이런 말은 늙은 서생이 늘 하는 말이라며 콧방귀를 뀌자 관로는 "무릇 노생(老生·늙은 서생)은 누군가 죽는 일까지 내다보는 법"이라며 그들을 타박했다. 외숙이 이 이야기를 듣고 관로를 책망하자 관로는 이렇게 말했다.

"곧 죽을 자들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삼국통일의 설계자 양호는 쿠데타가 일어나던 당시 전도가 유망한 관리였다. 조상이 양호를 막료로 쓰기 위해 초빙하자 양호는 함께 초빙받은 왕침에게 "몸을 맡겨 다른 사람을 시봉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소?"라고 거절했다.

조상이 죽자 해임된 왕침이 양호에게 물었다. "나는 경이 전에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소." 양호는 겸손하게 대꾸했다. "조상이 패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마의가 실권을 장악했지만 지방에는 위나라에 충성하는 군대 지휘관들이 있었다. 영호우는 그 대표격이었는데 아재비 왕릉과 사마의를 토벌하고자 했다. 왕릉의 아들 왕광은 이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사마의의 심중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아직 반역의 조짐은 없습니다. 오히려 현능한 인재를 발탁해 널리 임용하는 데에 자신의 세력을 부식하는 것보다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릇된 정령(政令)들을 정비하여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조상이 만들어놓은 악명높은 정령들 중 그가 바로잡아 놓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오직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아 부자와 형제가 모두 병권을 장악했으니 쉽게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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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이 민심을 얻고자 기울인 노력을 설명한 글이다. 사마의는 그렇게 위나라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에 힘입어 그 손자는 드디어 진(晉)나라를 개창한다. 후손들은 개국 기반을 닦은 사마의를 추존 황제(선제)로 모신다. 나라를 바로 잡는다며 조상 일당을 제거한 쿠데타는 사실 새 왕조를 열기 위한 화려한 팡파르였다. 이 대목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밝힌다며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12·12 군사반란과 꼭 닮았다. 전두환은 쿠데타에 성공한 후 5공화국 대통령에 오른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사마의는 손자, 전두환은 그 영예(?)를 안았다는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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