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지역 여성 항일운동 흐름
일본경찰에 떳떳이 맞선 기생·임시정부 지원금 보낸 부인
기생독립단 시위 전국으로 전파…혈성단 등 계기 임정 후원자로
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일제강점기 진주지역 여성 항일운동은 국내외 상황과 연결돼 있었다. 기생과 부인 등이 1919년 3월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후 여러 단체가 결성되면서 국권회복을 모색하고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 자금을 모으는 데 가담했다.

◇기생독립단의 결기 = 진주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정오께 봉래동 진주교회(옛 옥봉리교회) 신호용 종소리에 맞춰 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후 만세시위는 일주일 넘게 펼쳐진 것으로 전해 온다. 이를 기리고자 2012년 3월 18일 진주교회 본당에는 3·1운동 기념 종과 높이 11m 종탑이 복원돼 첫 타종을 했다.

만세시위를 위해 걸인도 기생도 거리로 나섰다. 걸인들은 일제가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현실을 원통해 했고, 기생들은 죽더라도 나라가 독립되면 아무런 한도 없을 것이라고 외쳤다.

특히 기생독립단은 태극기를 앞세워 남강을 돌아 촉석루를 향해 행진했다. 3월 19일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권번(기생조합) 소속 기생 30~50여 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다.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에는 진주 기생들의 만세시위 모습이 기록돼 있다.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부르며 남강을 따라오니 왜경 수십 명이 급히 달려와 칼을 빼어 쳤다. 기생 한 명이 부르짖어 말하기를 '우리가 죽어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여러 기생은 모두 태연히 전진하여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때 기생 5~6명이 구금됐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같은 진주 기생의 정신과 행동은 경기도 수원, 황해도 해주, 인근 통영 등 전국에서 잇따른 기생들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기생들은 천한 신분이었지만,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갖춰 유학인, 지식인과 교류가 잦았다. 예기(藝妓)라고 불렸으며, 관에 소속돼 있다는 생각도 강했다.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서게 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임하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은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2018)에서 "3·1운동은 여성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신들도 민족의 구성원임을 깨달았다"고 짚었다.

진주 걸인·기생 독립단 만세운동은 매해 재현행사로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진주문화사랑모임이 주최해 1996년부터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 있는 3·1운동 기념 종탑.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임시정부 지원부터 근우회 지회 창립까지 = 진주지역 향토사학자 추경화(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가 쓴 <진주항일운동사>(2008) '일제하 진주의 여성 항일운동' 부분에는 시대별, 인물별 활동이 정리돼 있다.

추경화 실장은 "3·1운동에는 기생들과 관련 유부녀들이 시위대열에 참가했다. 자택에서 항일단체를 결성하도록 장소를 제공했고, 부인들에게 한글 등 기본 교양을 가르치기 위한 부인야학회도 있었다"며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투옥된 투사들의 가족을 돕거나 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내고, 전국과 지방의 항일 단체에 가담하는 등 각 방면으로 협력해 항일 정신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1919년 진주에서 조직된 혈성단(血誠團)은 독립신문 등을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다. 단장은 홍수원(1899~1937), 단원은 30여 명으로 알려졌다. 이 중 여성 3명이 단원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같은 해 설립된 대한애국부인회도 독립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를 돕는 역할을 했다. 애국부인회 지부는 진주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 설치됐다. 추 실장은 "진주에서는 박순복(朴順福, 박성애 목사 부인, 32세)이 초대 지부장이었고 박보교(23세)는 2대 지부장이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갖춰 애국지사 여비 보조 등 자금 지원을 맡았다. 혈성단과 애국부인회 진주지부를 이끌던 진주 여성들은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도 교류했다.

1927년 좌우합작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가 창립한다. 이에 영향을 받아 같은 해 민족주의-사회주의 여성운동이 합심해 근우회(槿友會)도 첫발을 내디뎠다. 근우회 진주지회는 이듬해인 1928년 조직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회장은 성석순(成石順)으로 근우회 중앙집행위원·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근우회는 △교육의 성별차별 철폐·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봉건적·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의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혼인·이혼의 자유 △인신매매·공창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산전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 지급 △부인·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야간작업 폐지 등을 행동강령으로 채택했다.

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며, 진주에서도 학생들의 항일투쟁이 펼쳐졌다. 1930년 1월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 학생들은 노예교육 철폐와 광주 학생들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내 시위를 했다. 정금자(鄭錦子), 이을례(李乙禮) 등도 당시 학교 밖 시위에 동참했으며, 학생들은 무기정학 처분, 일경 검속이나 구금을 피하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진주항일운동사>, 추경화, 진주문화원, 2008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이임하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철수와영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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